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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공동체

풀무원 생태공동체

by 치우 posted May 1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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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원공동체

1. 풀무원공동체의 출발

"풀무 이름빌려 55년 부천서 문열어 굶주림 없는 세상 자립의 삶 모토로"

전쟁이 끝난 1955년부터 부천 소사에 남은 1만여평의 땅에서 풀무원 공동체는 시작됐다.

그러나 풀무원이라는 간판을 따로 내건 것은 아니었다. 갈 곳없는 이들이 들어와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사는 방식을 배워나가면 충분했기 때문에 간판 같은 형식은 필요없었다.

못쓰는 쇠를 녹여 낫이나 칼을 만들 때 사용하는 풀무. 다만 세상에 버려진 이들도 풀무의 도움만 있다면 세상에 필요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바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서 풀무원은 출발했다.

그런데 풀무라는 명칭은 이미 당시에 다른 데서 사용하던 것을 내가 빌어 쓴 것이다.

당시 충남 홍성의 풀무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무교회운동을 펼치던 이찬갑 선생과 주옥로 선생이 풀무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배울 형편이 안되는 농촌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함석헌(咸錫憲)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두 분은 교회 일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공동체를 시작할 무렵 풀무골을 찾은 나는 주 선생에게 “풀무라는 이름이 제가 하려는 공동체의 의미에 너무 적합한데 빌어다 쓸 수 있을까요”라고 넌지시 물었다. 주 선생은 “좋은 데 쓴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습니까”라며 그 자리에서 응낙해 줬다. 지금이라면 저작권이다 뭐다 해서 시끄러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 뒤 나는 풀무학원의 이사로 학교운영에 간여하게 됐다.

풀무원 농장은 밭과 임야를 합쳐 1만평 정도 됐다. 6채의 집 앞으로는 넓게 밭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야산이 둘러싼 모습이었다. 밭에는 포도와 복숭아 등의 과수를 심고 콩과 고추 같은 농작물도 심었다. 논도 있었지만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다. 축사를 만들어 소나 돼지, 염소 등의 가축도 키웠다. 농장규모가 꽤 컸기 때문에 사실 나 혼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굶주림없는 세상만들기가 풀무원공동체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전쟁고아나 노인뿐 아니라 멀쩡한 청장년까지 기아상태로 빠뜨렸기 때문에 기아해방 없이는 바른 삶에 대한 교육도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굶주림의 고통은 어린시절과 서울에서 보낸 청년시절에 경험했던, 내 인생 고비고비마다에 나타났던 몽마(夢魔)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시책 또한 먹는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일도 않고 노는 사람까지 먹여 살릴 수는 없었다. 바른 삶에 대한 교육은 둘째 치고라도 그런 식의 구호라면 농장유지도 힘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일하고 함께 먹자’는 원칙을 세웠다. 먹기 위한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나의 기아해결 방안이다. 이런 기본원칙에 교육과 신앙생활이 더해졌다.

공동체 생활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족회의였다. 대여섯 가족이 함께 모여 살다보니 사소한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예배를 겸해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여기서는 농장운영부터 가족들간에 풀리지 않는 오해와 불신까지 갖가지 이야기 보따리가 풀어졌다. 가족회의는 지금의 양주로 옮겨온 뒤에도 계속 이어져 풀무원의 전통처럼 됐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추어지자 전국 곳곳에서 함께 살아보겠다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쟁고아나 거지, 불량배, 심지어 경찰의 눈을 피해 들어온 범죄자에 나환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환자취급을 받는 ‘미감아’들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적응은 쉽지 않아 한달을 못채우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신념을 갖고 들어온 사람들은 2~3년은 기본이고 7~8년씩 함께 지낸 이들도 적지않다.

2. "힘 닿는데까지 함께 나누며 사는게야" - 공동체운동 실천하는 원경선 옹

‘나눔의 삶에 멈춤은 없다.’

‘생명운동 전도사’인 유기농부 원경선(元敬善 90, 환경정의시민연대이사장)옹. 그는 요즘 28년간을 꾸려온 경기 양주시 회천읍 4만평의 공동체 ‘한삶회’를 정리하고 내년 3월 충북 괴산군 청천면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느라 분주하다.

“IMF때 현미식혜를 개발했다가 소비위축과 재벌그룹 일반 식혜 덤핑으로 큰 손해를 본 후부터 공동체 이전을 준비해 왔어요.”

양주에선 유기농재배와 함께 현미식혜, 두부, 야채효소 등의 농산물 가공공장도 운영했지만,괴산에서는 전체부지 7만평중 대부분을 자신이 설립한 풀무원식품의 농장으로 쓰고 6000여평에 20여명의 공동체 식구들이 벼농사와 채소, 감자, 고구마 등 ‘소금만을 뺀’ 필요한 먹을거리 모두를 농약과 비료를 안 쓰는 유기농으로 경작할 예정이다.

● 아직도 트랙터 모는 아흔의 유기농부

원옹은 최근 괴산에서 함께 살 20여명의 공동체 식구들을 선발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이들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나눠쓰고 몫은 따로 챙기지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 자녀들은 고등학교까지 공동체에서 보내준다.

“새롭게 시작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아직도 트랙터를 몰 수 있어요. 자신 있습니다.” 성성한 백발,동안(童顔)의 미소에 괭이를 둘러맨 그의 모습은 언제나 편안한 느낌을 준다. 지난 98년 서서영 화백이 그려준 캐리커처에도 이같은 그의 이미지가 잘 표현돼 있다.

“공동체운동은 힘이 있는 한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나누며 사는 거지요. 도둑과 다툼이 없고 전쟁이 없는 세계를 지향하는 평화운동입니다.”

1914년 평안남도 중화의 극빈 가정에서 태어난 원옹은 초등학교를 16살에 간신히 졸업하고 그해 아버지를 여의었다.18살 때 기독교를 알게 된 후 “평생을 전도인의 자세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23살 때 홀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에서 광복 때까지 인쇄소를 운영했고,45년 귀국해 미군부대 공사청부업으로 재산을 모았다. 53년 부천 미군비행장 미군 군목의 권유로 떠돌이 전쟁고아나 비행청소년들을 모아‘풀무원농장’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대로는 쓸모없는 쇳덩어리를 연장으로 만드는 풀무처럼 새 사람으로 만드는 곳이란 뜻을 담았다.

● 현미 주식으로 하면서 건강 되찾아

회갑을 넘긴 76년 양주에 터를 잡고 친환경 유기농 공동체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유기농법은 처음엔 경험부족 등으로 실패했지만 78년부터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일반인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해 부인 지명희(86) 여사와의 사이에 얻은 2남 5녀중 맞아들인 혜영(전 부천시장)씨가 서울대총학생회장을 하다 시국사건으로 복역 후 출소, 사업에 동참했고 풀무원식품을 설립했다. 원 전 부천시장은 지난 96년 풀무원 경영수익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현재 기금이 22억원으로 불었다.

양주에서 유기농사를 지으면서부터 원옹은 100%의 현미만을 먹었고 주위에 현미를 ‘완전식품’으로 권했다. 현미를 주식으로 하면서 어린시절 간디스토마에 걸려 객혈까지 한 이후 그를 괴롭혀온 악성 빈혈증세도 모두 사라졌다.“쌀에 비해 단백질이 조금 모자랄 뿐 부족한 엽록소를 콩류로 보강하면 최고의 건강식이지요.”

원옹은 5개월 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집도한 서울 강남의 U정형외과 의사는 원옹의 전반적인 건강과 특히 골밀도가 젊은이 못지않게 높은 데 놀랐다. 그래서 젊은이들도 힘들다는 인공관절 요추 삽입수술을 했다.

원옹은 환경과 생명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 95년 유엔환경계획(UNEP)의 ‘글로벌 500상’을 수상했고 인촌상과 국민훈장도 받았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두 차례는 풀무원과 이사장을 맡고 있는 환경정의시민연대,경실련(고문), 국제기아대책회의(이사), 거창고교(이사장) 등에서 종교, 사회사업, 교육 관련 강의에 나선다.

●“유기농은 땅과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

서울 나들이에 나설 때면 교통편이 마땅치 않은 양주 ‘한삶회’ 거처에서 의정부까지만 승용차를 타고 나머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지난 2월엔 금강산 시범육로관광단에 최고령으로 참가해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다.

원옹이 이사장인 환경정의시민연대는 지난해 제1회 ‘올해의 나쁜 광고 대상’으로 ‘맥도널드 해피밀’을 선정한 데 이어 지난달엔 제2회 대상으로 화학물질 남용과 친환경 방법을 부정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은 P&G의 ‘페브리즈’를 선정했다.

“농사지어 먹고 살기 힘들게 된 건 사실이지. 그러나 유기농은 포기할 수 없어요.신이 주시고 만든,땅과 인간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니까.”

불혹(不惑)에서부터 반세기, 힘든 사람들과 함께하며 든든한 어깨가 되어 준 ‘인간상록수’ 원옹의 겨울은 그래서 미리 다가선 봄날처럼 따듯하다.

3. 소유욕 버리면 전쟁도 없다.

충북 청원의 화양계곡 부근은 참 맑은 곳이다.그림같은 강과 초정약수터를 지나 비에 촉촉히 젖은 수많은 풀잎의 합창 소리를들으며 충북 괴산군 청전면 평단리로 향했다. 평단리 산기슭에 둘러싸인아담한 논과 밭, 저수지가 어우러진 평단리 241번지. 한글로 발음하면 ‘이사일’이라 좀체 잊어버릴 수 없는 지명이다.지난 5월 이 곳으로 이사온 사람은 ‘생명을 풀무질하는 농부’ 원경선할아버지다.풀무원 창립자로 널리 알려진 원경선 환경정의시민연대 이사장은 올해 91세.

“이제부터 진짜 일을 할 것입니다.내 소원은 일하다 죽는 것이에요….”양주골에 살다 지난 5월초 이 곳으로 내려온 원 이사장은 전날의폭우로 저수지에 많은 흙이 쏟아져 들어가자 직접 포클레인을몰고 묵묵히 흙을 퍼올린다.정확한 각도로 포클레인을 운전하는솜씨는 90대라는 나이를 잊게 만든다.아흔이 넘은 청년 농군원 이사장은 못쓰게 된 습지에 물을 빼서 밭을 조성하는 등 억척스럽게 황무지를 일궜고 이 곳에 가장 먼저 평화의 씨앗을 뿌릴계획이다.

그가 닦는 길에서 평화의 싹이 피어난다.지난 76년 양주에서 유기농 공동체인 풀무원 한삶회를 시작해 지난 28년동안 없는 사람, 있는 사람, 병든 사람, 건강한 사람, 못배운 사람, 배운 사람이 다함께 농사를 지으며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했다.원 이사장은 괴산에서는 나눔의 실천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평화 공동체를일굴 계획이다.전국 곳곳에 생태공동체가 생기고 있지만 평화의공동체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다.

“하루에 먹을 양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누었기 때문에 양주로옮겨온 풀무원 농장은 28년동안 한번도 문을 잠그지 않고 살 수있었습니다.지킬 곳간이 없기 때문에 문을 잠글 필요가 없었지요. 이상일지 모르지만 일용양식 이외에 쌓아두는 것이 없게 되면 도적도 없어지고 궁극적으로 (전세계 어느 곳이든) 군대가 필요없게 될 것입니다.”군대는 이기주의적 욕심에서 비롯됐고 나와 내 가족을 위해 부를쌓고 그 부를 지키기 위해 군대가 필요했다는 점을 청동기 시대부터의 역사적 연원을 들어 역설했다.

얼마전 이 곳을 찾은 대학생들이 이라크전쟁 등을 예로들며 군대를 없애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환상이 아니냐고 질문하자그는 “이성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가능한 ‘굶주림과 군대와 전쟁이 없는 인류평화의 길’을 어렵다고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라며 스스로 체험한 철학을 들려줬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일을 하고 있는 원 이사장은 지난 97년 밀가루 300포대를 들고 몽골을 찾았다.당시 몽골은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였지만 물품을 나누면서 공산주의자나 라마교 승려나 너나할 것없이 이념과 종교를 뛰어넘어 서로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것. 이런 경험을 토대로 이 곳 괴산에서도 개인적 이기주의를 버리고 울타리없는 공동체적 삶을 살면서 군대가 필요없는 평화공동체를 상징적으로 실현해보일 계획이다.

원 이사장이 90대를 불태울 공동체는 우선 10∼20가구가 모여살게 된다.그의 일관된 모토는 자기가 먹을 것 이외에 나머지는이웃과 나눈다는 것이다.따라서 이 공동체에 들어오는 사람은개인의 재산을 모두 이웃이나 사회를 위해 쓰고 빈 손으로 입주하게된다.이 곳에서 공동노동을 통해 유기농법을 실천하면서 2000평 정도의 논에서 나오는 유기농 쌀로 먹을거리를 해결할 계획이다.또 3500평 정도의 밭에서 콩을 길러 생활 안정을 위한 기반을 닦겠다는 것이 원 이사장의 복안이다.논과 밭 옆에는 공동체에 입주할 사람들이 살 집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또 식당을겸한 강당과 20평 규모의 다락방으로 구성된 평화연수원을 건립하고 있다.

유기농 농사를 배우고 동시에 평화문제에 대해 함께 공부할 수있는 공간으로 쓸 계획이며 영어, 일본어, 중국어등으로 인터넷을 통해 평화철학을 세계 곳곳에 전파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다일 공동체에서 봉사하던 김일곤(40) 목사도 지난해 평화공동체에 합류했다.‘하늘따르미, 땅지키미, 사람사랑이 풀무평화공동체의 유기농 농사꾼’이라고 찍힌 초록빛 명함을 건넨 김목사는공동체 정지 작업을 위해 선발대격으로 작년에 이곳으로 왔다.

“공동체를 만든다고 해서 단절된 공간으로 남아있겠다는 공간적의미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지역안에 흩어져 있는 다른 공동체와 함께 살 생각이며 평화운동을 어떻게 행동할지차근차근 배워나가겠습니다.평화연수원에서는 1주단위, 한달단위 등 다양한 평화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방침입니다.”김목사는 최근 황토방에서 장작불로 납두균을 발효시켜 냄새안나는 유기농 청국장을 만드는데 성공했다.이 공동체에서 나는 콩을 주력 상품으로 삼아 외국인들이나 도시 아파트 주민들에게도인기가 높은 냄새안나는 청국장을 만드는데 쓸 계획이다.

원 이사장과 김목사는 한 목소리로 공동체가 자기 집단만을 위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을 경계했다.

2003년 현재 60억 인구중 10억 가량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2초에 한명꼴로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내일 자기가 먹기 위해 쌓아놓지 말고 오늘 굶주린 이웃을 위해 나눠주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원 이사장의 평화 철학은 의외로 단순한 데가 있다.“누구든 이곳에 와서 일할 수 있습니다.도시에 살던 사람도 한 3년 정도농사일을 배우면 어디가서든 먹고 살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유기농으로 몸도 건강해지지요. 특히 돈의 노예에서 해방되고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 개인의 평화를 이루는 셈이고 그 다음에는 베푸는 실천으로 인류의 평화에 힘쓰는 사람이되지 않겠습니까.”그는 마태복음 6장 34절을 해석하면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한 일부 번역은 오역이며 원문에는 “내일 일은 내일이염려한다고 돼 있다(Tommorow will worry about itself)”고 말했다.

원 이사장은 이처럼 하루 동안 수고하면 그날을 위해 부족함이없기 때문에 “내일도 모레도 일생동안 장래 먹을 것을 염려하지말라. 그리고 나눠주라”는 나눔의 철학으로 이해했다.

또다른 평화문제인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그의 목소리는젊은 사람 못지않게 힘찼다.

“환경전문가는 아니지만 내 생명을 귀하게 여기다보니 유기농을하게 됐지요. 특히 현미식을 먹고 건강이 놀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그걸 먹고 내 건강이 좋아지니까 그 때 이웃을 위하니 내가 덕을 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웃이 곧 나’라는진리를 알게 된 것이죠.최근 환경문제와 관련, 비누와 양잿물은한 10m정도 흘러가면 정화가 되지만 제초제와 합성세제는 20년동안 분해가 안됩니다.

미국 남부 늪지대의 독수리 80%가 환경호르몬에 중독돼 알을 부화하지 못했다고 합니다.논에 뿌려진 제초제는 플랑크톤이 먹고 물고기가 먹어 다시 독수리가 잡아먹었기때문이지요.”나눔을 통해 기아와 불평등을 해소하고 유기농법 실천으로 건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풀무평화 사람들의 실험은 ‘생명과평화’를 동시에 살리는 절묘한 해법인 셈이다.

문화일보 2004/07/09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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