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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공동체

생체공동체를 찾아서...네번째(16-19)

by 치우 posted May 1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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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생태공동체 일구는 능길마을 풀씨네 / 전북 진안군 - '들판으로, 세상으로 날아가는 풀씨처럼'

▲ 능길산골학교 운동장에 선 나무씨 불씨 홀씨 짚씨 올리브씨 피씨 사과씨 홍화씨 겨자씨(사진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처음엔 ‘대학생들 왔다’고 생각한 마을 분들이 많았어요.”
농촌에서 지금 보기 귀한 것은 젊은 사람들이니만큼 ‘젊은 사람들=농활 온 대학생’으로 여긴 것일 수도 있겠고 ‘살러 온’ 사람들인데, 잠깐 ‘왔다 가는’ 사람들로 지레짐작한 것일 수도 있겠다.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능길마을에 새 식구 아홉 명이 늘었다. 자신들을 ‘마을에 온 아홉 난장이, 혹은 패거리’라고 말하는 풀씨네. 이곳에서 호적 이름자로 불리는 사람은 없다. 홍화씨 겨자씨 짚씨 피씨 올리브씨 사과씨 홀씨 불씨 나무씨 등등 모두 무엇인가를 싹틔울 ‘씨’로 산다. 씨들의 나이는 20대부터 40대까지.  어떤 인연으로 한데 뭉쳤을까. 당사자들은 “뭐, 악연이죠”라고 웃지만 같은 뜻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렇게 만나게 돼 있나 보다. (주)이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다. (주)이장은 생태마을가꾸기, 생태건축, 생태관광, 유기농산물유통, 지역축제나 테마마을 기획 등의 일을 하는 곳. 단순히 직장동료이기 이전에 ‘생태공동체 일구기’라는 공동의 지향성을 가지고 일했던 만큼 자연스레 자신들이 직접 겪고 살아 보는 ‘생태공동체’로 이어졌다.
홍화씨는 “공동체라 해서 거창하고 어렵게만 생각할 것은 아닌 것 같다. 들여다보면 우리 몸뚱어리도 하나의 공동체이지 않은가. 몸뚱어리가 각자 제 할 일 하며 서로를 도와 지탱하고 굴러가게 하듯 그런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회복해 가고자 한다”고 말한다. 먼저 내려온 사람은 불씨였다. 능길마을에 생태마을만들기 컨설팅을 하러 와서 석 달 정도를 살았다. “그 기간의 경험을 통해 능길마을에는 ‘사람들’이, 또 우리 아홉 명의 풀씨들에겐  뜻하는 삶을 담을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을과 우리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9월초에 풀씨네는 능길마을에 이사왔다. 깊은 우물과 녹슨 가마솥, 흙벽 뒷간이 있고 뒷산이 바짝 붙어 있는 집이 당분간 풀씨네의 집이다. 혼자 허물어져 가던 이 빈집은 사람 온기와 손길이 보태져 이제 비로소 ‘집’답다. 그것도 식구수가 아홉이나 되는 집이다. 홀씨 말하길 ‘정말 삶의 터를 옮겨왔구나’하는 실감이 드는 순간은 “분명히 퇴근하고 귀가했는데, 아까 사무실에서 봤던 사람들이 내 집에서, 내 방에서 어슬렁거릴 때. 밥도 한 상에서 같이 먹고, 잠도 한 방에서 같이 잘 때”라고 말한다.  함께 하는 생활이라지만 공동의 규율 같은 것을 명시하거나 강제하지는 않는다.

“완고한 틀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이전에 2년 정도 몇 가구가 함께 귀농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 공동생활을 통해 틀이 완고할수록 사람들이 마음 다치거나 어긋나는 경우도 많다는 걸 느꼈다. 틀은 만들어 강제하기보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체득될 것이다”는 게 홍화씨의 말이다.  

저녁7시 하루반성과 앞으로 할 일을 점검하는 ‘마음나누기’ 시간 외에는 ‘좀더 자유롭게’ 서로를 놓아 두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살아 있는 개성 그대로가 어우러지는 공동체. 굳이 틀이 있다면, 직장을 정리하고 이 곳 진안 농촌의 삶을 택하게 된 동기처럼 “몸으로 살자”는 것.


마을 사람들하고도 친해지고 싶지만, 조급하게 욕심내지 않는다. 살려고 내려온 만큼 무엇이든 억지로가 아니라 긴 호흡으로 일궈 내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답은 ‘살다 보면’이다. “일년 열두 달 서로 ‘함께 겪는’ 일이 늘다 보면 마음도 그만큼 가까워져 있지 않겠는가.”

▲ 폐교된 능길초등학교에 새롭게 문 연 '능길산골학교'
아이들이 흙만지고 뛰놀며 자연 체험할 수 있는 학교로 꾸려진다.

지금 풀씨네가 제일 먼저 하려는 일은 능길마을 대표 박천창씨 등과 함께 산골학교를 꾸리는 일이다. 35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폐교된 능길초등학교가 그 터다.  11월1일 개교한  ‘능길산골학교’는 오는 12월부터 내년1월까지 다섯 차례 각 3박4일 일정으로 꾸려진다.  시골밥상 염색교실(황토) 전통교실(두부만들기, 짚꼬기, 새끼줄넘기, 연날리기, 썰매지치기 등) 풍물교실 무예교실 작문교실 탐구교실(동굴탐사, 별자리관찰) 등으로 꾸려진다. ‘산골’의 자연 속에서 뛰고 놀고 배우고 체험하는 생태학교인 것. “우리는 놀이를 통해 크고 자연 속에서 컸는데 요즘 도시아이들에겐 ‘놀’ 기회가 없다.  지금의 도시교육 입시교육은 삶의 지평을 넓혀 주고 경험을 다채롭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지평을 오히려 좁히고 시선을 한 곳으로 고정시킨다. 공부 외에 다른 일은 모두 ‘딴 짓’이 되는 상황이다. 아이들에게 이곳 생활이 마음그릇을 크게 하는 경험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흙을 밟고 조물거리고 그냥 재미있게 놀다만 가도 아이들에겐 좋은 시간일 것”이라는 게 겨자씨의 말이다. 여름·겨울 방학동안의 캠프 말고도 평상시에도 도-농학교, 대안학교 교류 등을 해 나갈 계획이다. 세상과의 단절이나 고립이 아니라 ‘또 다른 관계맺음’ 혹은 ‘삶의 확장’. 풀씨네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이기도 하다. “이 곳 자체가 우리들의 학교이기도 하다. 다시 걸음마를 배우듯 농사를 비롯 기본적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살림’을 시작하는 학교인 것이다.” 농사만 지으려는 것은 아니다. 출판 디자인 웹 염색 마을계획 등등 각각의 전문 분야를 살려나갈 생각이다. ‘PC 전문가’여서도 ‘피씨’로 이름붙여진 피씨의 경우처럼 각각의 자질과 장점이 이 곳 생활에도 이어질 것이다. “시골에 들어간다는 것은 흔히 ‘농사짓는다’와 동의어가 된다. 그러나 의사 목수 대장장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역할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 마을이 제대로 굴러가듯이 여러 분야의 능력과 소질이 어우러질 때 온전한 지역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년이면 할 일이 많다. 결혼한 풀씨들의 경우, 가족들도 이곳으로 내려오므로 우선 집을 지어야 한다.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욕심내지도 않을 것이다. 직접 우리 힘으로 짓는 것이니만큼 초막이나 원두막처럼 좀더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해나갈 것이다.”  집이 집답게 본연의 의미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도 그 집짓기에 스며들 것이다. “집은 평당 얼마짜리의 부동산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 담기는 그릇이다. 하지만 시장 위주의 사고방식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며 가치를 교란한다. 집이든 먹을거리든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본연의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살고 싶다”는 게 홍화씨의 말이다. 풀씨네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된 먹을거리 하나 만들어 냈으면 하는 꿈도 갖고 있다.  사과씨는 농촌계획이란 전공을 이 터에서 펼쳐 내고 싶다고 말한다. “도시계획이란 말은 익숙해도 농촌계획은 낯설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시에만 계획이 있는 게 아니다. 지속가능하며 마을의 공동체성을 살리는 터로서의 농촌을 맘에 그리고 있다.”마음 부풀 일도 많지만 그 한켠에 우린들 왜 먹고사는 문제며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겠는가고 말하는 풀씨네.  “과연 이 일, 생태공동체 마을모델 만들기가 남은 삶 동안 내가 사심 없이 아무 미련이나 후회 없이 헌신할 수 있는, 진정으로 진심으로 하고 싶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일인가. 이 일밖에 없는가. 심지어 남들에게, 세상에 잘난 체 할 수 있는, 더 폼 나는 일은 없는가를 자문할 때가 가장 힘든 때”라고 말하는 홀씨. 그럴 때마다, 잔머리로 생각하는 걸 멈추고, 다른 풀씨 동지들과 몸으로 노동하면서, 또는 아예 그냥 놀면서 정신차려 일어서곤 한단다. 이런 주문을 읊조리면서. “용기있는 지혜는 나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악한 것을 통쾌히 분석하는 것이며, 어려운 것을 즐기는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을 감사히 생각하는 것이다.”
싹을 틔우기 위해 들판으로, 세상으로 날아가는 풀씨. 작은 산골 능길마을 풀씨네의 꿈도 이제 막 그렇게 세상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중이다.

ⓒ 전라도닷컴 남신희 기자 기사출력  2003-11-03

 

17.산촌마을 /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 '공동체..꿈과 낭만이..하지만 자연의 소중함과 땀의 결실을 알게 되는.. '허병섭 신 지식인님의 삶과 가치...

 

■ 다양한 정보를 습득·적용

허병섭 목사는 30여 년간 서울에서 도시빈민들과 삶의 애환을 함께 하며 그들의 자립을 돕던 생활을 정리하고, 1996년 4월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로 삶의 근거지를 옮겼다. 처음 무주에 근거지를 마련할 때에는 친환경적으로 살겠다는 단순한 희망이 전부였는데, 그러한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따라 내려고, 모이면서 12가구가 하나의 산촌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삶의 공동체가 탄생하게 된 데에는 물질문명에 대한 반성, 인간중심의 생태계관으로 지구 생태계 파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작지만 생활의 변화로부터 시작하자는 깨달음이 우리 사회에 싹트기 시작한 사회적 배경도 한 몫을 했다. 친환경적인 새로운 삶을 준비하던 1995년, 허병섭 목사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먼저 귀농을 한 사람들의 삶을 배우고,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또한 함께 하는 사람들과 친환경적인 삶에 대해 지속적으로 토론하며, 노장철학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가꾸는 대안적인 삶에 대하여 열심히 연구하였다. 농사짓는 방법에 대한 공부는 우선 유독성 농약과 화학 비료로 이미 오염 될대로 오염된 땅을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유기농법에 대한 연구를 시작, 땅 작물을 건강하게 생장시켜, 사람을 살리는 먹거리를 만드는 실천하게 된다.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산촌마을,

세인들은 생태마을이라고 부르는 그 곳엔 우리의 산과 들과 동떨어진 별장같은 집은 없다. 으리번쩍 크게 지은 집도 보기가 어렵다. 산비탈에 나무에 둘러싸인 작은 집들이 아담하니 서로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다. 집을 마련하는데도 최대한 자연의 소재를 이용하여,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지은 흙집들이다. 물론 수세식 화장실도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의 몸에서 나온 배설물들은 모두 그대로 자연에서 분해되어 다시 생명을 키우는 양분으로 쓰인다.  이러한 시스템을 마련하기까지 초기 마을을 일구고, 2-3년 동안은 매일같이 같이 모여 학습도 하고, 도시생활에서 자연생활로 적응하는 어려움들을 나누었다고 한다. 

■ 새로운 발상으로 지식을 창조·활용

허병섭 목사가 유기농을 시작한 것은, 건강에 부쩍 관심을 갖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춰 경제적으로 이득을 보기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다. 일반 야채보다 훨씬 비싼 값에 팔리는 유기농 야채의 생산은 득이 되기는 하겠지만, 결국에는 시장경제의 시스템 속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숨돌릴 겨를 없이 노동을 해야 가능한 일이고, 소박하게 시작한 시골살림과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경제적인 안정, 그것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한 경쟁을 하고 세계화 정책에서 살아남고 하는 것은 일면 자연인으로서의 한 개인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의 온전한 기쁨은 오히려 적게 소비하고, 살림의 규모를 줄이고, 자연이 우리들에게 주는 것만큼으로 자족하며 노동에 치이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쓰는 것이라는 것이다.  “1991년 리우 환경회의에서 처음으로 ‘지속가능한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개발한다면 개발에 따른 환경의 파괴로 지구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각심에서 그를 위한 각국의 개발자제와 오염물질 배출 규제 등을 합의했지요.  그러나 그때보다 지구환경이 더 나아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 이 상태로 간다면 ‘지속가능하지 않은 지구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우리는 후손들이 누려야 할 몫을 빼앗아 생활하는 것입니다.”  허병섭 목사는 작물을 살리는 유기농법에서 이제는 땅심을 살리고, 자연을 가능한 훼손하지 않는 자연생태계를 보존하면서도 충분하게 먹거리를 생산하는 자연농법(태평농법)에 더 많은 공을 기울인다.  기존의 농사와는 다른 개념으로 시작한 이러한 일들은 ‘지속가능한 삶’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그 가능성들을 확인하고, 새로운 지식을 얻게되고 그것을 또 활용하다 보면 또 다른 부분을 체험하고 점차로 확장되어간다고 한다. “시장에 갈 일이 별로 없습니다. 주식?부식은 논과 밭 그리고 산과 들에서 얻을 수 있고, 옷이나 가구들은 다른 사람들이 버리는 것들을 모아서 재활용?재사용(리싸이클링)합니다. 세제등의 생필품은 오염이 적은 무공해 제품을 사용합니다. 그것을 생산하여 공급하는 업체가 있거든요.”  친환경적인 삶은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것이다. 작은 시작이지만 그 삶의 의미는 정말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생태계는 생명부양계, 생명을 부양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들이 상호간에 공생하고, 공존하고 어울리게 하는, 풍성하게 하는 생명의 바다입니다.”  먹고 먹히는 관계로 인식하고 밟고 일어서야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물질문명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그의 삶은 발상의 전환을 넘어서 일대 변혁적인 삶으로 보일 수 있다.

■ 일하는 방법을 혁신함으로써 가치를 창출

이런 대안적인 삶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 그러나 의외로 이런 삶을 동경하고 언젠가는 그렇게 살아야지 하면서 준비를 하는 사람은 많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무주군 산촌마을을 방문한다고 한다. 실제 그곳에 살고 있는 12세대도 이전부터 특별히 아는 사이는 아니었고, 귀농운동분부를 통해 무주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친환경적인 삶이라는 꿈을 현실로 가능하게 한 허병섭 목사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주군 안성면에는 대안 생태학교 “푸른꿈 고등학교”가 있다. 푸른꿈 고등학교는 1999년에 개교했고, 올 2월에 1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93년부터 전교조 출신 교사들이 기존의 학교에서 적응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준비하였는데, 학교를 세울 장소를 찾는 중에 허병섭 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생태이념을 구현하는 학교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그는 현재 푸른꿈 고등학교의 이사이며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강의도 일주일에 2회하고 있다. 푸른꿈 고등학교에서는 유기농법은 물론, 자연농법, 친환경적인 삶의 구현에 필요한 가치관의 확립 등을 주된 내용으로 가르친다. 한 학년 25명을 정원으로 하는 푸른꿈 고등학교는 가능하면 지역성을 살리려 정원의 50%는 그 지역 출신을 입학시키려고 한다. 서울 및 대도시 집중화 현상은 벽지에 문화적 공동현상을 낳게 했고, 그 간극은 점차 넓어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폐교된 구진도 초등학교를 매입하여 학교를 세울 때 그러한 이유로 지역주민들은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벽지에 학교를 세우는 일은 그 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된다. 마치 볍씨 한 알이 7-80알의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전북 무주는 전국 몇 개 안 되는 생태마을 중 대표로 손꼽힌다. 이러함에는 사회?문화적인 토양도 함께 만드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그 전 과정을 정보화하여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사람

허병섭 목사는 현재 밭작물 600평, 벼농사 600평의 농사를 짓고 있다. 그리고 월 2-3회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기농법?자연농법의 중요성을 강의한다. 오래전부터 귀농운동본부에서 고정적으로 농사법 강의도 한다. 또 1년전까진 계간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고도 풍족한 시간의 여유를 갖는다고 하니 그 비결은 경제적인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자연을 희생시키고 스스로의 삶의 여유를 포기하는 일을 버렸기 때문이다. 작은 것에서 우주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생각과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산과 들, 그곳에 살고 있는 온 생명들과의 대화가 즐겁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가치를 혼자만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확산하고, 함께 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허병섭 목사는 여러 환경운동가와 단체들과 함께 무주에서 한 시간 가량의 거리에 있는 함양에 녹색대학과 대학원을 설립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녹색대학은 지역과 함께 하는 작은 대학으로서, 앎과 삶이 어우러지고, 상생과 공경을 배우며, 생태를 체득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된다고 하니, 현대문명의 진정한 대안을 설파할 수 있을 것이다.  무주에 와서 농사를 지으며 길게 또는 짧게 메모했던 산문들을 묶어서 아내와 함께 “넘치는 생명세상이야기”라는 책도 발간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그리고 그러한 살림살이의 의미를 강조한 이러한 저술은 귀농과 친환경적인 삶을 살고자하는 사람들에게는 귀중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허병섭 신지식인님과 함께 떠나는 공동체 삶의 모습.. 이제는 우리가 모두 함께 찾아 봅시다..바로 이 사람을 통해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촌마을(2)-무주군 안성면 '밀알노동 가족들'

밀알 노동 가족들이 전북 무주군과 진안군 일대에 모이기 시작한 그 처음은 허 병섭씨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헙병섭씨는 1995년 6월에 귀농을 결심하고 뜻 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전국을 돌면서 유기농업이나 자연농업을 하는 사람들 을 탐방, 견학하였다. 당시 기독교 사회운동 연합의 공동대표였던 그는 김광훈 사무총장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모임'을 하면서 귀농에 관련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 무렵 허병섭씨는 정농회의 오재길 선생의 [천보농장]에서 실습도 하고, 경기도 여주와 강원도 평창으로 옮겨다니면서 정착지 를 찾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 그는 그의 귀농 이정표를 짜기 시작했고 그 꼭지점을 [밀알노동]으로 잡아놓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귀농의 목적의식 을 뚜렷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그가 개척한 동월교회의 교인들이 귀농자금을 지원해 주었고 이 힘을 토대로 그는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에 생활의 둥지를 틀게 된다. 1996년 3월 부터 이 지역을 답사하고 4월 4일에 주민등록을 옮겨 본격적인 농사활동을 시작한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그는 지역주민들의 보살핌과 도움으로 터를 일구고 씨를 뿌린다. 물론 유기농업과 자연농업의 철학과 신 념을 땅에 쏟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안성면의 접경지역인 진안군 동향면 학선에 있는 폐교된 작은 학교를 발견하고 다음에 귀농할 사람들을 생각 하고 그들과 함께 이 지역에 유기농 수련장 및 도농의 유기적 관계를 위한 공간을 구상하게 된다. 결국 그는 동향초등학교 학선분교를 3년간 임대하게 된다(1997년 3월). 이해 4월에는 권혁천씨 가족이 합류하여 학선 분교를 크게 손질하고 관사 에 입주하게 된다. 권혁천씨는 성남주민교회 교인이었고 신협과 어린이 책 사랑방 운영으로 지역활동을 한 사람이며 귀농운동본부에서 개설한 [귀농학 교] 제 1기 수료생이다. 이들 두 가족은 협업농 처럼 재미있게 농사를 했다. 이해 여름 무렵(8월) 박창호 가족이 학선분교의 나머지 관사에 합류하고 최 승일씨 가족도 진도리 회호동에 빈집을 얻어 귀농했다. 이 두 가족은 귀농 학교 제 2기생들이다. 10월에는 전재원씨 가족이 진도리 하오동에 있는 빈 집으로 이사했다. 또 심재욱씨는 빈집을 찾지 못해 원촌 주유소의 빈 방에 서 영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귀농통문』을 보고 직접 찾아 오거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온 사람들이다. 현재(98년 2월) 이곳에는 이렇게 모인 여섯 가정이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의 귀농은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전재원씨, 최승일씨, 박창호씨 는 광대정에 6천여평의 땅을 사게되고, 권혁천씨, 심재욱씨는 동향면에 있는 문중땅을 장기 임대하여 농사계획에 분주하다. 98년 2월에는 산청에서 2년 동안 농사를 하던 김광화씨 가족, 서울 NCC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이던 김경남 목사, 자유기고가 장진희씨가 이곳으로 주 민등록을 옮겼다. 그리고 소설가 공선옥씨도 합류하기로 약속이 된 상태이 다. 이들은 허병섭씨와 함께 광대정 입구에 있는 당산에 6천평의 땅을 매입 한 상태이다. 이들은 인간적으로 쉽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밀알터]라는 이름으 로 모인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이름에 관해 공식으로 논의한 일도 없다고 한다.

이들은 공동체인가?

공동체를 찾아 탐방하고 있는 우리의 눈에는 밀알 공동체로 보이는데 이 들은 '우리는 공동체가 아니다'라고 강변하고 있다. 우리가 확인한 사실은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인데 이 사실 자체가 공동체가 아니냐고 되짚어 보았 지만 그들은 '우리는 좋은 이웃이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무슨 규약을 갖춘 조직된 공동체는 아니다'고 한다. 이들은 개인의 생각을 서로 존중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유기농업이나 자연 농업을 하는 공통된 지향점은 있지만 이것도 개인의 집합이지 공동의 결의 로 모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규제하 거나 설득하거나 약속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끈끈한 정으로 묶여 있었다.  그리고 외부에서 부르듯 '생태마을'이니 '생태공 동체'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며 이들은 생태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은 서로들간의 암묵적 약속이라고 한다. 무주에 모인 사람들이 만난지 오래 된 것도 아니고 전인격적인 만남의 기회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라고 최종 판 단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는 밀알 공동체란 선입관을 가지게된 내력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허병섭씨가 낸 소식지 [밀알터]를 귀농통문에서 '생태마을'로 소개되면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의 소식지는 개인의 생각과 생 활을 담은 것이었고 그 어디에도 생태 마을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단지 허 병섭씨의 생각과 삶이 생태적이라는 귀농통문의 해석에 그 원인이 있었고 유행하는 신조어와 그 실현지를 갈망하는 욕구가 그렇게 표현된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허병섭씨의 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밀알터' '밀알노동'을 추 적하기로 했다.

밀알노동이란 무엇인가?

유기농업류의 어떤 책에도, 환경운동에 관한 책에도 찾아 볼 수 없는 이 '밀알노동'이란 개념을 이 바닥에 던져놓은 허병섭씨의 생각은 이러했다. 그는 생명사상과 철학을 열심히 학습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기농업 과 자연농업의 현장을 탐방하고 관련 서적을 읽고 또 실습도 했다. 그런데 사상과 실천을 매개하는 고리를 찾지 못해 고심하다가 발견한 것이 밀알노동이라고 한다. 허병섭씨의 상은 실천가인데 그 실천은 신앙과 신념을 바탕 으로 한 것이다. 그는 귀농실천을 위한 신념을 밀알노동으로 잡은 것이다. 그는 한신대 이준모교수의 『생태철학과 생태적 교육학』이란 책에서 이 개 념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하는데 머물지 않고 자기해석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서울에서 실천한 빈민 운동, 민중교육운동, 목회자 운동, 지역사회운동 등을 밀알노동으로 재해석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귀농은 도시 생활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밀알노 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밀알노동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한알 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밀알노동 즉 희생하는 노동) 많은 열 매(생명)을 얻을 수 없다' 다음에 소개할 생태마을에 대한 생각도 이 말에 집약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조성한다느니 설계한다느니 이룬다느니하는 따 위의 위(爲)가 없다. 다시 말해서 '무위'(無爲)이다. 그런데 그의 주변에서는 항상 무언가가 일어나고 잇다. 그래서 그는 '무위이화'(無爲以化)를 말하기도 한다.

생태마을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그의 생태마을에 대한 생각은 '21세기 생명의 시대-새로운 대안을 찾아' 심포지움에서 '귀농과 생태마을'분과 발제에 잘 나타나 있다. 밀알노동의 관 점에서 바라보는 생태마을의 구상에 관련된 부분을 요약해 본다.

1. 밀알노동은 노동론적 존재론적 실천에 몰입하는 하나의 형식이다. 유기 농업이나 자연농업이 밀알노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해도 그 결과를 돈이 나 자본으로 계산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산출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는 것 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기농업이나 자연농업은 생태주의적인 농업일 수 밖 에 없다는 것이다.
2. 이러한 밀알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웃하여 살 수 있다면 생태마을을 조성하는 첫 걸음이 될수 있을 것이다.
3. 자연의 생명산출의 원리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이다. 끊임없는 먹음과 먹힘을 통해서 자연의 생명력이 날로 풍성해지는 것이다. 생태마을의 조성 은 이천식천을 체험할 수 밖에 없다. 자연에게 먹히운다는 것은 자연에게 돌려줄 것을 아낌없이 돌려준다는 말이면서 자연의 생태계와 삶을 나눈다는 것이다.
4. 생태주의적 농업 태도는 채소와 곡물을 인간의 생명을 위한 먹을거리 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생태계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 (밀알노동)은 인권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자연권의 회복을 위한 노동에 중 심을 두는 것이다.
5. 이런 관점에서 지역사회, 정치, 경제, 문화, 역사를 바라볼 것이다. 이는 생태마을에서 일어날 자녀교육및 지역주민교육의 방향과 연결된다. 자연의 권리를 신장하고 생태계를 심화시키는 것만이 세계를 구원하고 해방하는 길 임을 교육의 목표로 삼을 것이다.
6. 생태마을의 문화도 종교도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먹히 는 생명과 먹는 생명의 자기관계(自己關係)를 문화적이고 신적(神的)이라는 의미를가진 문화와 종교를 찾아볼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비생태 학적 원한을 풀고 생태학의 문화적 종교적 형식이 있다면 '한울로서 한울을 변화시키는'(以天化天)이다.
7. 살 집은 그 땅에서 나온 나무와 흙을 기본 소재로 할 것이다. 난방을 비롯한 에너지도 자연적이며(풍력이나 수력)생활오수와 폐수도 자연정화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 것이다.
8. 마을주변의 농토나 계곡 산과 여기에 서식하는 소동물도 자연의 순리 에 맡길 것이며 생태계의 보고가 되도록 할 것이다.
9. 선조들의 생활양식, 생활환경을 복원해 볼 것이다.
10. 우리의 생태마을이 주변의 마을에 확산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의 기대

이들은 무언가 다르다. 특히 허병섭씨는 별난 생각을 하고 있는것 같다. 그러나 그는 별나지만 틀리지 않는 그 무엇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첫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가 설정한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하여 여러 사람의 귀감이 되기를 바랄 뿐이 다. 그리고 이곳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더불어 삶이 언젠가는 생태적 공동체 로 모범을 보일 날이 빨리 오기를 희망하고 있다

황호완(02-701-9863)

 

18.생명누리 공동체 / 경남 합천군 용주면 - 생명누리 공동체,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는 사람들

1996년 9월, 경남 거창에서 다섯 사람이 모였다. 서울에서 강의와 목회를 하다가 5년 전 거창에 자리잡고 생명누리 농원을 일구며 농촌을 되살리는 노력을 해 온 정호진 님, 우리의 교육 현실을 안타까워하다가 1996년 3월부터 산청의 간디농장에서 대안교육을 준비하면서 공동체 경험을 쌓은 김영숙·송만호·호용수 님, 그리고 부산에서 제도교육의 한계를 고민하다 사표를 내고 농촌으로 온 이정국 님이 그 다섯이다. 그 자리에서, 건강한 생활과 교육을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 함께 생활하며 농사와 학습에 힘쓰기로 모두의 뜻을 모았다.  한 식구가 된 가족은 정호진(43)·김귀주(33) 부부와 한솔(9)·아림(6)이 가정, 김영숙(34)·서헌대(40) 부부와 곧음(7)·푸름(5)이 가정, 송만호(27, 미혼) 단독세대, 호용수(36, 미혼)와 이한양(할머니, 82) 가정, 이정국(38)·이정애(32)부부와 충인(8)이 가정(두 모자는 부산 거주)이다.   우리는 우선 9월 한 달 동안, 정호진 님이 생명농법으로 해 온 양봉과 우리밀, 콩, 팥 등의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데 전념했는데, 김영숙·송만호·이정국·호용수 님은 곧음이와 푸름이 두 아이와 함께 산청에서 거창의 생명누리 농원으로 출퇴근하였다. 10월 1일부터는 그 동안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 더욱 짜임새 있는 생활을 하기로 했다. 먼저 우리 모임의 이름을 '생명누리 공동체'라고 짓고, 공동체의 통장을 만들어 출자금을 100만 원씩 냈다. 아침과 저녁은 각자 자기 집에서 먹고 점심은 식사 당번을 한 주에 두 명씩 정하여 함께 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비용으로 한 달에 5만 원씩 거두었다.

땅과 더불어

늦여름의 뙤약볕 아래서 잡초와 싸우고, 벌에 쏘여 팔이 고무장갑에 바람을 불어넣은 듯 부풀어오르기도 했지만 10월이 되자, 자연은 어느덧 손으로 거두기엔 벅찬 수확물들을 안겨 주었다. 따도 따도 끝이 없는 고추, 원시시대 수렵 채취 사회를 연상시킨 메밀 '채취', 한 그루가 그 많은 깍지를 주렁주렁 달고 딸려 나오는 팥넝쿨, 터는 소리와 향내가 귀와 코를 즐겁게 하는 들깨…. 그러나 이번 농사는 대체로 흉작이었다. 씨앗 소독을 거부하고 심은 대가로 율무는 반 이상이 하얗게 변했고, 거창 지역에 유난히 심했던 가뭄으로 콩 수확은 도리깨질하는 팔에 힘이 빠지게 했다. 한 해 동안 정호진 님 가족과 손님들이 들였던 정성과 땀, 항상 해가 지고 어두워져서야 돌아간 산청 식구들의 여러 손길에도 수확량은 지난해에 견주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모두 올 추수를 하면서 농사가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운 협력 속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콩 수확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고추를 그루째 걷어낸 뒤, 만여 평의 땅을 트랙터를 빌려 갈아엎었다. 먼지구름을 뚫고 기름 냄새를 맡으며 트랙터를 모는 일은 생태적으로 건강한 영농 규모와 기술, 그리고 기계 문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실마리가 되었다. 겨울 작물로 대부분 밀을 심고, 나머지 이삼백 평에는 마늘과 양파를 심었다.  지난 초여름에 베어 낸 밀짚은 퇴비를 만들기 위해 모두 거두고 보니 커다란 산이 되었다. 동물 우리에서, 닭과 염소 똥이 톱밥과 섞여 2년 이상 쌓인 좋은 거름을 한 트럭 퍼내어 마늘과 양파 밭에 쏟아 붓고 로타리를 치고서는, 땅이 이래야지 하며 모두들 흐뭇해했다. 양동이와 대야에 우리밀 씨를 담아 걸어가며 씨뿌리는 모습은 방문객들이 찬탄하는 그 곳 경치와, 때마침 비끼는 햇살의 역광과 함께 한 폭의 그림이었다. 밀씨를 뿌린 뒤 트랙터로 다시 로타리를 치고 나니 다음날 마침 비가 와, 땅 위에 내리는 고마운 비를 우산도 안 받고 들판에서 맞으며 지난 여름의 가뭄을 잠시 잊었다.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이젠 각자가 작물들을 한 가지 이상씩 맡아 책임지고 전문가가 되기로 하였다. 내년에 처음 시작할 벼농사(유기농법으로 할 터인데, 우렁이 농법을 생각 중이다)는 모든 일에 거침없이 달려들면서도 무위자연을 추구하는 김영숙 님, 마늘과 양파는 당분간 요양하듯 수도하듯 살고 싶다는 이정국 님이 맡았다. 아궁이 불을 피울 때마다, 온돌 아랫목 같이 따뜻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건강한 교육의 장작불을 생각하는 송만호 님은 감자와 고구마를 맡았고, 호용수 님은 늦깎이 공부를 마무리하느라 서울 가고 없는 사이에 선택의 여지없이 상추, 배추, 무, 가지, 파, 고추를 비롯한 온갖 채소와 양념거리를 다 안아버렸다. 우리밀과 콩은 해 온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그 업보를 진 듯한 정호진 님이 맡았다. 그밖에도 샛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일과를 늘 같이 하지는 못하지만, 옆에서 자주 참신한 훈수로 도와주는 김귀주 님, 중소기업을 아직(!) 하고 있지만 자연 친화적인 삶에는 누구보다도 한발 앞서는 서헌대 님이 작물 한 가지씩을 맡아 볼 것으로 기대된다.

새살림의 교육

교육 계획은 크게 우리 스스로 하는 학습과 대외적 교육 사업으로 나눌 수 있다. 10월부터 주마다 화요일 오후와 목요일 오후 2시∼5시 사이에 세시간씩 자체 학습 일정으로 잡고, 함께 나눌 학습 내용을 건강, 교육, 농사, 공동체, 놀이와 인간관계 훈련들로 정했다. 먼저 정호진 님이 여러 해 동안 강습하고 시술해 온 손침을 모두 배우기로 하고, 지역 사회의 몇 분과 함께 지금 하고 있다. 손침은 가장 민중적인 생활 건강법으로서, 종합병원 숫자로 의료 수준을 재는 우리 의료계 현실을 풀뿌리에서부터 극복하는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생각을 다들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웃 주민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그들과 가까워지는 징검다리가 된다는 점에서도 참 좋게 여기고 있다. 새로운 학교에 대해서는, 그 교육 철학과 내용, 규모, 시작 시기에 대한 그림이 우리 안에서도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생태주의적 세계관(자연과 인간이 하나됨)과 공동체적인 삶을 강조하며 자유와 자율을 기초로 하는, 작은 학교를 하자는 데에는 모두가 일치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은 중ㆍ고등 과정의 청소년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아 교육을 포함한 초등 교육과 대학을 중심으로 한 고등 교육 또한 큰 관심사이다. 특히 대학은 최근 소규모 대학 설립이 가능해져서, 참된 농업과 교육을 익히는, 정신이 살아 있는 작은 대학을 세우는 것이 꿈만은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대학을 만드는 일에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리는 주어진 여건을 활용하면서 현실에서 가능한 수준부터 시작하여 차츰 제대로 된 교육을 실천해 나가자는 기본 자세를 가지고, 12월 1일 회의를 거쳐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경남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에 이미 확보하고 있는 땅을 공동체 식구들이 능력껏 나누어 사고, 그 곳에 삶터와 학교 터를 닦기로 한 것이다. 이 땅은 합천댐의 보조 댐인 조정지댐 바로 옆에 있는, 약 100m 높이의 야산으로서 배산임수의 명당에는 못 미치나, 그 땅에 섰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와 주변 경관은 사뭇 여유있고 아름답다. 이미 11월 18일부터 진입로(임도) 공사에 들어가, 전에는 단지 소나무숲으로만 보이던 곳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여 차츰 아름다운 삶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은 집터, 농사터, 학교터와 같은 활용 구획을 나누지 않은 상태라 요즘은 소나무들을 일부 솎아내고, 아래 가지들을 쳐내어 어디 내놔도 아름다운 정원수가 되게끔 손질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솔잎으로는 무공해 솔잎 효소를 담그고, 쳐 낸 가지들은 구들을 데우는 땔감으로 쓰고 있다.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신나는 학교를 만들려 하는 우리의 꿈이 단지 이 공동체 식구들만의 꿈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 꿈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삶과 교육의 질, 그리고 후손에게 물려줄 환경을 걱정하고 대안을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관심사이고 참여의 대상이다. 우리는 단지 이 일에 더욱 매달릴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일 뿐이다. 앞으로 세울 학교의 교육 목적에서부터 학교의 형태, 교육 내용, 규모, 재정들을, '학교 설립 위원회'를 광범위하게 구성하여 많은 뜻 있는 분들과 함께 의논하려 한다. '생명누리 학교 설립 위원회(가칭)'는 100여 명 정도로 구성하고, 그 중 자주 모임을 가질 수 있는 10여 명 정도의 실행 위원이 일을 추진하는 주축이 되는 틀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1997년부터는 청소년과 어른을 대상으로 자연의 품에서 생명농업과 생태건축, 그리고 생명존중의 철학과 건강한 공동체 생활을 서로 나누는 생명학교와 계절학교를 열 예정이다. 이는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한 일인 동시에 앞으로 세우게 될 새로운 학교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자리잡고 살기

지난 11월 8일, 고품리 터에 가까운 합천군 용주면 봉기리에 산청의 네 가정이 한꺼번에 이사를 했다. 빈 집들에 살림을 풀고 마을 분들께 인사 드리니 다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다 잘살게 된다'는 덕담을 하신다. 100호 가까운 제법 큰 마을이다. 12월 중순부터는 정호진·김귀주 님 가정이 자리잡을 집에다 현대식 겹구들을 놓는 일을 하고 있다. 전통적 지혜를 심야 전기를 써서, 현대식으로 되살리는 공법인데, 진주 MBC에서 두 차례에 걸쳐 촬영해 갔다. 이제 그 동안 공동체 식구들이 군을 달리하면서 먼 길을 출퇴근해야 하던 시절을 마감하고, 명실공히 한동네에 모여 살게 되었다. '공동체'란 그 결속 정도와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관계 설정에 따라 그 모습이 참으로 다양하지만, 우리는 우선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차츰 함께 하는 부분을 늘려 가기로 했다. 그래서 고품리 땅을 살 때나 봉기리에 이사할 집을 구할 때도 일단은 일반적인 매매나 전세의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이사할 곳의 전세금이나 월동 연료비가 특히 많이 드는 집의 경우, 그 비용을 다른 식구들이 각자의 형편에 따라 기쁘게 분담하는 공동체성을 창조하기도 했다.생활을 하는 데 드는 돈은 12월부터, 공동체 일을 하는 이에게 한 달에 40만 원씩(하루 2만 원, 주 5일) 나누기로 정하고 가족 수당(피부양 가족이 어른일 때는 10만 원, 아이는 5만 원)을 따로 두었다. 여기에는 공동체 살림과 개인 사정에 따라 융통성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공동체 바깥에서 돈 버는 일을 할 때에는 그 일로 빠진 날만큼의 몫을 스스로 빼고, 일의 성격에 따라서는 번 돈 중의 일부를 공동체 기금에 넣기도 한다. 현재 공동체 기금으로는 1백만 원씩의 출자금과 각자가 고품리 땅을 구입하면서 조성한 1천만 원의 개발비가 있다. 올 겨울에는 당장 농사로 인한 수입원이 없어 '자발적 빈곤'이 아닌 어쩔 수 없는 긴축 경제이지만, 앞으로 살림이 펴지더라도 생태적으로 건강한 수준의 자발적 빈곤을 실천할 생각이다. 지난 추석에는 거창 사과를 비롯한 생명누리 농원의 생산물로 생계비와 기금 마련을 해보기도 했는데, 거창에 뿌린 밀이 익고 이 곳에 새로이 짓는 농사가 그 결실을 보게 되면 우리 공동체의 자립 수준은 좀더 좋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생명과 자연을 존중할 줄 모르는 현대문명과 무너져 가는 농촌, 깊이 있는 인간관계가 점점 사라지는 이 사회에서 어쨌든 건강한 삶과 교육의 공동체를 꾸려내 신나게 살아 볼 수 있는지는, 이제부터 온몸과 마음으로 풀어 나가야 할 우리 모두의 꿈이고 시대의 과제이다.

귀농통문 2호 (1997년 봄)

 

19.쌍호공동체  경북 의성군 안사면 쌍호리-농민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자.. 지난 9월 24일날 생명환경신앙대회 국밥장터 때 딴 마을서 빌렸던 그릇들 얼마 주면 되겠습니껴?”  “2만원은 좀 약할 것 같고, 3만원 정도면 어떻겠십니껴?"   “5만원 정도는 주어야 안되겠십니껴?”  “아.. 5만원은 너무 많은 것 같은데예” “자.. 그럼 3만원으로 결정합니다”지난 10월 6일 있었던 제244차 쌍호의 월례회 광경이다. 경북 의성군 안사면 쌍호리, 의성과 안동과 예천의 경계 근처 낙동강변에 위치한 쌍호공동체는 17가구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로서, 우리에게 모범적인 농민운동과 농민공동체로서 매우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이날 월례회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20여 분 정도 참석(이곳은 부부가 모두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하였는데, 지난 9월 24일 문경에서 있었던 가톨릭교회의 큰 행사였던 「2000 대희년 전국환경신앙대회」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 때 쌍호에서 국밥집을 운영했고, 이를 결산하는 내용이었다. 빌려온 그릇을 얼마 쳐줄 것인가라는 아주 소소한 문제에서부터 총 결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행사에 대한 평가에서 10월달에 있을 대학생 봉사활동 수락여부에 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주제들을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쌍호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남성과 여성 가릴 것 없이 17가구 전체 성원이 참여하여 매달 개최되는 이 '월례회'이다. 월례회에서는 마을의 공동결정을 내려야 할 주요 안건들 뿐 아니라 공유해야 할 각종 정보와 소식, 이야기 등이 허심탄회하게 공유되는, 그야말로 완벽한 직접 민주주의의 장이다. 성원 중 한 명이라도 이의를 제기하게 되면 처음부터 안건을 다시 검토하기 때문에 그만큼 결정에 있어서 오류의 여지가 줄어들게 된다. 지난 70년대 후반 이후 쌍호의 월례회는 단 한 번 건너뛴 적 말고는 지금까지 244차에 이르는 동안 거르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고 한다. 쌍호의 생명력은 이 월례회 속에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쌍호공동체가 지금까지 굳건하게 유지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월례회를 통한 마을 주민들간의 완벽한 의사소통구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월례회보다도 더 중요할 지도 모를) 것이 월례회가 끝나고 다과와 술을 나누는 친교의 시간이다. 이 시간을 통하여 마을 주민들은 토론시간 때 행여나 남아있었을 지도 모를 감정의 앙금들을 말끔히 씻어내고, 새로운 결의들을 다지는 것이다.

쌍호의 개요 및 역사

이곳은 지난 70년대 후반 이후 전국적으로 가장 모범적인 농촌공동체 사례로 꼽히는 곳이다. 가톨릭농민회를 거쳐 현재는 전농 의성군농민회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으며, 환경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협동사업들을 꾸준히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 마을은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상당히 넓은 들판을 갖고 있지만, 뒷편으로 골짜기가 있어 벼농사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 나는 거의 모든 채소들을 재배하고 있다(하지만 역시 마늘과 고추가 주품목이다). 구한말부터 가톨릭 교회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마을 주민의 거의 모두가 가톨릭 신자인 이곳 쌍호공동체의 역사는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는 이 마을의 실질적인 리더인 우영식씨가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시작하고 쌍호분회를 출범시키면서부터이다. 쌍호분회는 1979년 안동농민회 ‘오원춘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운동의 튼튼한 기반을 갖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인근 농민들의 신뢰를 얻어갔으며, 80년대 안동 지역 및 전국에서 일어난 각종 농민관련 사건들에 맞서서 마을 주민들이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 당시에 마을 주변에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었지요.. 그네들이 우리 마을은 무서워서 감히 접근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농민운동 뿐만 아니라 시청료 거부, 그리고 부역제도 거부투쟁을 펼쳤습니다. 이런 지역운동들을 계기로 농민회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농민들도 그 때부터 농민회 활동에 신뢰를 갖기 시작했구요. 이곳은 지금도 시청료를 걷으러 오지 않습니다” 우영식씨가 눈에 광채를 발하면서, 그 당시의 사건들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신다. 그 당시 공유했던 투쟁으로 다져진 역사적 기억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뚜렷한 지역적인 공동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하였고, 그 힘이 지금까지도 쌍호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닐지.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산 역사가 현재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 90년 전농이 출범한 이후 현재까지도 쌍호공동체는 의성군농민회의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의성군농민회 부회장을  쌍호에서 배출했으며, 쌍호공동체의 전 주민이 농민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후 생명운동으로 운동의 기치를 바꾼 가톨릭농민회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생산공동체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가톨릭농민회가 가장 잘 되는 곳으로 평가받고 있는 안동지역(안동 가톨릭농민회) 내에 쌍호와 비슷한 공동체가 13곳(퇴강, 풍양, 한울, 구담, 화동, 장수 등)에 이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쌍호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꾸준하게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점으로 가장 높게 평가를 받고 있다.

쌍호의 현재

90년대 초반 이후 이 마을에서 행해지는 모든 농사는 철저히 무농약의 원칙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벼농사도 오리농법과 우렁이농법을 사용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에서 출하되는 농산물들은 경북 북부지방(안동, 예천, 상주, 영주)의 생활협동조합운동체인 “생명의 공동체”(80년대 후반부터 시작), 그리고 가톨릭농민회의 생협조직인 전국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로 나가고 있다. 이들은 가톨릭이라는 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90년대 초부터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관행 농법에서 무농약 농법으로 전환한 것이다. 또한 쌍호의 특징은 몇 가지 협동사업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현재 메주, 간장, 고춧가루, 무말랭이 가공사업 등이 행해지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현재 쌍호공동체 내 4가구가 행하고 있는 참기름 협동사업이다. 마을 내에 쌍호기름방이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기계를 설치하고, 주로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참기름을 짜서 병에 포장하고 있다. 이렇게 생산된 참기름은 다른 농산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의공동체’와 가톨릭농민회 쪽으로 출하되고 있다. 물론 공동판매와 일부 소규모 공동가공사업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현재의 협동사업들이 다른 지역의 협동사업 사례들과 비교해 볼 때 그리 만족스러운 정도의 것들은 아니다. 또한 퇴비생산과 같은 유기농에 필요한 기본적인 작업도 현재는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전에 10년 전에는 마을 전체가 경작계획을 수립하여 공동생산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고, 쌍호는 개별경작과 공동판매라는 안정적인 방식을 택했다. 물론 공동가공사업도 참기름과 같은 소규모로만 행해지고 있다. 서로 간에 장단점이 있겠지만, 그 때문에 지금까지 커다란 부채와 사업 실패, 마을 내의 커다란 갈등 없이 안정적으로 공동체가 유지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이곳 사례를 소개함에 있어서 쌍호가 가톨릭이라는 신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유지되고 있는 공동체라는 것이, 이곳 모델을 다른 곳으로 전파하기 어려운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쌍호는 다른 지역에 있는 상당히 폐쇄적인 종교적 농촌공동체와는 달리 주민들이 가톨릭이라는 신앙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만 존재할 뿐, 어떠한 외부와의 벽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평범한 우리 농촌 마을이며 이곳에 살고 계신 분들은 전형적인 우리 농촌의 농민들이다. 소위 말하는 ‘도사들의 집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쌍호가 전국적으로 모범적인 사례로 주목을 받아왔고, 따라서 이곳 사례가 더욱 애착이 가는 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점은 마을 어른들이 무농약 농사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돈 벌 생각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농사 짓지 않습니다. 그냥 농약 주고 비료 주고 편하게 농사짓지.. 요즘엔 그런 충동을 몇번씩 느끼곤 합니다.” 이 마을 한 어른의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 환경농업이 처해 있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이다. 무농약으로 전환한지 십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수확량은 기존 농법보다 많지 않고, 노동력은 몇 배로 더 들고, 몇 해에 한 번은 병충해 때문에 그대로 갈아 엎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에서, 마을 어른 한 분은 올해 고추를 병충해 때문에 하나도 못 건지고 그대로 날렸다고 한다. 농약 한 번만 치면 싹 죽어버릴 병충해를 어쩔 수 없이 눈 앞에서 보고만 있는 농민들의 심정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이처럼 힘든 농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도시 소비자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안전한 먹을 거리를 공급해야 한다는 긍지와 사명감 때문이라고 속내를 털어 놓으신다. 이러한 사정을 도시의 소비자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쌍호의 미래 : 세대 교체 문제

쌍호가 앞으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도시지역과 든든한 협력관계를 확립하는 것, 즉 구체적인 한 지역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동안 쌍호공동체는 서울의 목동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자들과 4년째 관계를 맺고 농산물 소비 및 견학 및 체험행사 등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주된 관계는 아니었다. 앞으로 쌍호는 목동과 좀 더 구체적이고 활발한 교류활동들을 펴나감으로써 도농협력공동체 건설 구상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쌍호의 미래가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쌍호가 현재 처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마을 전체가 고령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40대 중반이고, 50대 중후반이나 60대 초반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의 자녀들은 거의 모두가 서울 등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고 뒤를 이으러 아직까지 마을로 내려온 적은 없다고 한다.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공동체가 하루 빨리 재생산의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계속 명맥을 이어나가기가 상당히 힘들어질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 농촌지역 거의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마을 전체가 고령화되다 보니, 마을 전체에 있어서 적극적인 결정들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쌍호공동체가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이,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사업들을 벌이지 않고 마을 내에서 조용히 내실을 다져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이 지속되다 보면 약점으로 바뀔 여지가 있다. 공동체가 보수화 내지는 정체화될 우려가 생기는 것이다. 고령화되어 가는 마을 주민들이 추가적인 협동사업을 꺼리는 것도 앞으로 쌍호가 좀 더 의욕적인 농업생산공동체로 쇄신을 거듭하며 발전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개별적인 생산 및 외부구매로 충당하던 퇴비를 대신해 마을공동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공동 퇴비생산시설을 갖추고, 마을차원의 작부계획을 수립하여 좀 더 계획적인 생산을 수행하며, 보다 발전된 형태의 가공사업에 착수하는 것 등은 앞으로 쌍호가 한단계 진보한 형태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시금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쌍호가 앞으로도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이를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는 든든한 무기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월례회라는 훌륭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주민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서 어려운 난관들을 잘 돌파해 나갈 것이며, 날로 쇠락해 가고 있는 우리 농촌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슴 속에 가득 채우고, 밤이 깊어 별이 쏟아지고 있는 쌍호를 뒤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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