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주 쉽게 말씀하시나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도 두려움이 이기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건 왜입니까?
두려움 속에서 살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고, 가장 강한 자가 승리하며, 가장 영리한 자가 성공한다고 들어왔다. 너희는 지고한 사랑의 영광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하여 너희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가장 잘 적응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영리한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치며, 어떤 상황이든 자신이 이에 못미치는 것처럼 여겨지면 잃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못미치는건 곧 잃는 것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너희는 두려움에 뒷받침된 행동을 선택한다. 너희가 이제까지 배워온 게 바로 그런 것이기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것은 이렇다. 너희가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을 선택할 때 너희는 생존 이상을 하게 될 것이고, 이기는 것 이상을 하게 될 것이며, 성공 이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Who You Realy Are(이하에서 '참된 자신'으로도 번역-옮긴이), 또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깨닫는 충만한 영광을 체험할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너희는 악의는 없으나 잘못 알고 있는 너희 속세 선생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다른 원천에서 나온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너희 중에도 그런 스승들은 많다.
너희에게 이런 진리들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이끌어주고 깨우쳐주는 사람들 없이, 내가 너희를 그냥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러나 깨우쳐주는 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존재는 너희 외부에 있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희 내면의 소리이다. 이것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어 내가 첫 번째로 사용하는 도구이다.
내면의 소리는 너희에게 가장 가까우니 내가 말하는 가장 큰 소리이다. 그것은 자기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이 너희가 규정하는 식대로 참인지 거짓인지, 옳은지 그른지, 혹은 좋은지 나쁜지 말해주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너희가 그냥 내 버려두기만 하면 스스로 알아서 방향을 정하고, 배의 진로를 잡고, 여정을 이끌어주는 레이더이다.
그 소리는 너희가 읽고 있는 바로 그 말들이 사랑의 말인지 두려움의 말인지 당장 그 자리에서 이야기해준다. 너희는 그 이야기에 따라 그 말들을 유의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당신은 내가 항상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을 선택한다면, 내가 누구고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깨닫는 충만한 영광을 체험할 거라고 하셨는데 이 점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모든 삶에는 다 하나의 목적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너희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충만한 영광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밖에 너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들은 모두 이 기능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에 너희의 영혼이 해야 하고, 너희 영혼이 하고 싶어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목적의 경이로움은 그것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끝남은 일종의 한계인데, 신의 목적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 더없이 충만한 영광 속에서 자신을 체험하는 순간, 너희는 바로 그 자리에서 더 큰 영광이 실현되기를 꿈꿀 것이다. 체험이 깊어질수록 너희는 더 깊게 체험할 것이며, 깊게 체험할수록 너희의 체험은 깊어질 것이다.
거기에 내재된 가장 심원한 비밀은 삶이 발견의 과정이 아니라 창조의 과정이란데 있다.
너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Who You Realy Are 찾아내려 애쓰지 말고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Who You Want to Be(이하에서 '되고자 하는 자신'으로도 번역-옮긴이) 판단하도록 하라.
삶이 일종의 학교 같은 것이고, 여기서 우리는 특정한 교훈들을 배우게 되어 있으며, 일단 "졸업"하고 나면 더 이상 육체에 얽매이지 않고 더 큰 것들을 추구해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는 말인가요?
그것은 인간의 체헝에 근거한, 너희 신화의 또 다른 부분이다.
삶은 학교가 아닌가요?
그렇다.
우리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니고요?
그렇다.
그럼 우리는 왜 여기 있죠?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고 재-창조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되풀이해서 말해주었는도, 너희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 사실 너희 스스로 '자신'을 창조해보지 않고도 그 말을 믿을 수도 없으니까.
뭐가 뭔지 잘 모르겠군요. 학교 얘기로 다시 되돌아가 보도록 하죠. 저는 많은 선생들로부터 삶은 일종의 학교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당신이 그걸 부정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교는 너희가 알고자 하는 어떤 걸 모를 때 가는 곳이다. 너희가 어떤 걸 이미 알고 있고, 너희가 원하는 것이 그 앎을 체험하고 싶은 것뿐이라면, 너희가 가야 할 곳은 학교가 아니다.
삶(너희의 표현대로)이란 너희가 이미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기회이다. 이걸 하기 위해 뭔가를 배울 필요는 전혀 없다. 너희는 그저 이미 알고 있는 걸 기억해내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렇게 시작해보자. 영혼, 너희의 영혼은 언제나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영혼에게 숨겨진 것, 미지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앎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혼은 체험하고자 한다.
네가 자신의 관대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관대함을 펼치는 뭔가를 하지 않는다면, 너는 오직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가 자신의 친절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면, 너는 자신에 관한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 영혼이 지닌 유일한 갈망은 자신에 관한 가장 위대한 개념을 가장 위대한 체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개념이 체험이 되기 전까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색에 불과하다. 나는 나 자신에 관해 오랫동안 사색해왔다. 너희와 내가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이 세상 나이의 몇배나 되는 이 우주의 나이보다 더 오랫동안. 그러니 나 자신에 관한 내 체험이 얼마나 짧고 얼마나 새로운지 족히 짐작이 가리라!
또 다시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당신 자신에 관한 당신의 체험이라구요?
그렇다, 나 자신에 관한 내 체험 말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해주마.
태초에 '존재'Is는 존재했던 모든 것all there was이었고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재 전체'All That Is는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존재 전체'가 곧 존재했던 모든 것이었고 그 밖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리하여 '존재 전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 전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에.
이것은 신비론자들이 시간이 시작된 이후로 줄곧 다뤄온 저 위대한 '존재/부재Is/Not Is'의 등식이다.
이제 '존재 전체'는 자신이 이미 존재했던 모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더없는 장대함을 체험이 아닌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러나 그것이 갈망한 것은 자신에 대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그토록 장대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나 "장대하다"는 용어 자체가 상대적인 용어이기에 그런 체험은 불가능했다. '존재 전체'는 비존재가 없이는 장대함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비존재가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겠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 말씀 계속하시죠.
좋다.
'존재 전체'가 알았던 단 한가지는 자기말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기 외부에 있는 어떤 준거지점에 비추어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준거점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오직 단 하나의 준거점만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유일한 거점, 즉 "존재-부재", "있음-없음" 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인 전체'는 체험으로 자신을 아는 쪽을 택했다.
이 에너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관찰되지 않는, 따라서 다른 어떤 에너지도 파악할 수 없는 이 순수 에너지는 더없는 장대함으로 자신을 체험하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이렇게 하려면 내부의 준거점을 이용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의 어떤 부분도 필연적으로 전체보다 못한 게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단순히 자신을 여러부분으로 나누기만 해도 전체보다 못한 각 부분은 자신의 나머지를 돌아보고 그것의 장대함을 목도할 수 있으리라는, 아주 정확한 추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존재 전체는 영광스런 한 순간에 자신을 이것과 저것인 것으로 나누었다. 처음에 이것과 저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존재했다. 그럼에도 둘은 함께 존재했다. 그 어느쪽도 아닌 전체가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불현 듯 여기 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 그리고 여기도 저기도 있지 않지만 여기와 저기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건 무nothing이고, 공간을 지탱해 주는 건 비공간이며, 부분을 지탱해 주는 건 전체다.
이걸 이해할 수 있겠느냐?
내 설명을 따라오고 있는가?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믿고 안믿고는 차지하고요. 당신은 아주 명쾌한 보기를 들어가면서 설명하셨기에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더 앞으로 나가보기로 하자. 지금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이 무(無)를 신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신이 아닌 어떤 것, 곧 "무"가 아닌 모든 것이 있다는 걸 뜻하므로 정확하지 않다. 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망라한 '전부'이다. 그러므로 나를 이렇게 '위대한 보이지 않음', 즉 '무' 또는 '사이 공간 Space Between'으로 설명하는, 동양 특유의 신에 대한 신비주의 정의 역시 신을 보이는 모든 것으로 규정하는, 서양 특유의 실용주의 설명만큼이나 정확하지 않다. 나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다.
이제 신은 "여기" 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을 창조하여, 신 스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내부로부터 일어난 이 엄청난 폭발의 순간에 신은 상대성relativity을 창조했으며, 그것은 신이 일찌기 자신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따라서 관계relationship는 신이 일찌기 너희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점은 나중에 상세히 논의 하기로 하자.
그렇게 해서 '무'로부터 '모든 것'이 솟아났다. 덧붙여 말하면 이것은 너희 과학자들이 빅뱅 이론이라 부르는 것에 딱 들어맞는 영적인 사건이었다.
그 모든 요소들이 앞으로 내달릴 때 시간이 창조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처음에는 여기 있다가 다음에는 저기 있으니,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는데 걸리는 기간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존재의 보이는 부분들이 자신들을 서로 "관련된" 것으로 정의하기 시작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 역시 그렇게 했다.
신은 사랑이 존재하려면, 또 자신을 순수한 사랑으로 인식하려면 그것의 대립물도 존재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신은 자진해서 그 위대한 극단, 사랑의 절대 대립물, 곧 사랑이 아닌 모든 것, 오늘날 두려움이라 부르는 것을 창조했다. 두려움이 존재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사랑은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그 대립물 사이의 이원성을 창조한 이 사건이 바로 인간들이 여러 신화들 속에서 악의 탄생이니 아담의 타락이니 사탄의 반란 따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너희는 순수한 사랑을 신이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던 것처럼 비천한 두려움을 소위 악마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다.
이 지구의 몇몇 사람들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투쟁과 전쟁, 천사의 군대와 악마의 전사들, 선과 악의 힘, 빛과 어둠의 힘들이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갖춘, 꽤 정교한 신화들을 만들어냈다.
이 신화들은 인류가 그 영혼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으나, 그 정신으로는 좀처럼 인식하기 힘든 우주적 사건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주기 위해서 생겼다.
신은 자신의 나눠진 변형으로 우주를 있게 하면서 순수 에너지로부터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만들어 냈다.
달리 말해 그렇게 해서 신은 물질 우주뿐만 아니라 형이상의 우주까지도 창조한 것이다. 존재/부재의 등식 중에서 부재를 이루는 신의 부분 역시 전체보다 작은, 무한히 많은 수의 단위들로 폭발했다. 이 에너지 단위들을 너희는 영혼이라 부른다.
너희의 종교신화들 중 일부는 이 사건을 "아버지 신"이 많은 영적 자식들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스스로 번식하는 생명체라는, 인간의 체험에 견준 이같은 비유는 현실에서 일반대중에게 갑작스런 출현이라는 개념, 즉 "하늘 왕국"에 무수한 영혼들이 갑작스레 존재하게 되었다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보면 너희 신화가 말하는 이야기들은 궁극의 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전체를 이루는 무수한 영혼들은 우주적인 의미에서 내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나눈 것은 나 자신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줄 내 부분들을 충분히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주임을 체험으로 아는 방법은 딱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 무수한 부분들 각각에게(내 영적인 자식들 모두에게) 전체인 내가 갖고 있는 창조력과 똑같은 창조력을 부여해줬다.
너희의 여러 종교가 너희는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 꼴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 말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신체가 서로 닮았다는 뜻은 아니다.(신은 특정 목적을 위해 택하는 물질 형상이 어떤 것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말은 우리의 본질이 같다는 뜻이다. 우리는 같은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같은 성질"이다! 우리는 똑같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으며, 허공에서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비롯하여 같은 능력들을 지니고 있다.
내가 영적인 자식인 너희를 창조한 것은 나 자신을 신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나로서는 너희를 통하는 것말고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에 대한 내 목적은 너희가 자신을 나(神)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리고 이미 여러 차례 말해왔다.)
이것은 굉장히 간단해보이지만, 더 들어가면 아주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너희가 자신을 나로 인식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방법은, 우선 너희 자신을 나 아닌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야기가 아주 미묘해질테니 내 얘기를 따라오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준비되었느냐?
그런 것 같습니다.
좋다. 이런 설명을 요구해온 건 너라는 걸 명심하라. 너는 여러해 동안 이것을 고대왔다. 너는 신학 교리나 과학 이론이 아니라 속인(俗人)들의 평이한 용어로 이런 설명을 요청해왔다.
그랬죠 - 전 제가 뭘 요구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네가 청해온 것이니 받아들일 것이다.
자, 이제 문제를 단순하 하기 위해, 논의를 위한 토대로 신의 자식이라는 너희의 신화 모델을 이용해보자. 그것이 너희에게 친숙한 모델이기도 한고, 또 여러 가지 면에서 진실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 인식이라는 이 과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자.
내가 내 모든 영적인 자식들에게 자신들을 내 부분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한가지 방법은 그것을 그냥 그들에게 얘기해주는 것뿐이다. 나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영혼이 자신을 그냥 신 또는 신의 일부, 신의 자식, 또는 하늘왕국의 상속자(또는 너희가 이용하는 신화가 어떤 것이든간에)로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이미 설명했듯이 뭔가를 안다는 것과 그것을 체험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영혼은 자신을 체험으로 알고자 갈망했다.(내가 그랬던 꼭 그대로!) 개념으로 안다는 것만으로는 너희에게도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온 우주에서 가장 비범한 착상이며 가장 빛나는 합작품이다. 내가 여기서 합작품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너희 모두가 나와 더불어 그 계획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계획하에서, 순수 영혼인 너희는 이제 막 창조된 물질 우주로 들어가게 된다. 물질성이야말로 너희가 개념으로 아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해주는 유일한 길이기에. 내가 맨 먼저 물질 우주와 우주를 지배하는 상대성 체계와 그밖의 온갖 피조물들을 창조한 까닭도 사실 거기에 있다.
내 영적 자식들인 너희가 일단 물질 우주로 들어가면, 너희는 자신에 관해 아는 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희는 그 대립물을 알아야 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너희는 키다 작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자신이 키가 크다는 걸 알 수 없다. 너희는 말랐다는 걸 알지 못하면, 뚱뚱함이라는 자신의 일부를 체험할 수 없다.
궁극의 논리에 따르면, 너희는 너희 아닌 것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자신을 자신으로서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이, 즉 너희 아닌 것이 너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의 목적이자 모든 물질적 삶의 목적이다.
이제 궁극의 앎에서, 곧 너희 자신을 '창조주'로 인식하는 경우에, 너희는 직접 창조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을 창조주로서 체험할 수 없다. 또 너희가 자신을 창조하지 않을때까지는 너희는 자신을 창조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기 위해서 너희는 먼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내 말을 잘 따라오고 있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 상태에 계속 머므르라.
물론 너희가 너희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너희는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러할, 바로 그것(순수하고 창조할 수 있는 영혼)일 뿐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을 벌였다. 즉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스스로 잊게 만든 것이다.
너희는 물질계로 들어오면서 자신에 관한 기억을 지웠다. 덕분에 너희는, 말하자면 성(城) 안에서 그냥 깨어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너희가 완전한 선택권을 가진 존재, 즉 규정상 신(神)인 존재로서 자신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너희가 신의 일부라는 얘기를 듣는 데서가 아니라 신의 일부가 되고자 선택하는 행동 속에서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문제라면 너희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겠는가? 너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너희가 내 자식이 아닐 수는 없다. 하지만 너희는 잊을 수는 있다.
너희는 지금껏 언제나 신성한 전체의 신성한 일부, 그 몸체의 한 구성부분member이었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전체와 재결합하는 행동, 신에게로 돌아가는 행동을 기억remembrance이라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사실상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재구성하는re-member 쪽을, 너희의 전체인 내(神) 전체를 체험하기 위해 너희의 여러 부분들과 함께 결합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의 너희의 직무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너희는 이미 알고 있으니) '자신'을 재구성하는(기억하는 - 옮긴이)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는remind 것(즉 그 사람들에게 다시 마음쓰는re-mind것)이 너희의 직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훌륭한 영혼의 스승들이 하나같이 해온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너희의 유일한sole 목적이다.
다시 말해 너희 영혼soul의 목적이다.
맙소사. 이건 정말 단순하군요. 또 정말..... 대칭적이고. 제 말은 모든게 다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는 겁니다! 갑자기 모든게 다 그렇게 맞아들어가다니! 지금 저는 예전엔 한번도 끼워맞춰보지 못했던 그림을 보고 있어요.
좋아. 좋아. 이 대화의 목적이 바로 그거니까. 너는 내게 대답을 요청해왔고. 나는 네게 대답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너는 이 대화를 책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만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의 일부다.
자, 너는 인생에 관해 던질 많은 질문과 의문들을 갖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 기반을 다져놓았고, 다른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터전을 깔아놓았다. 이제 다른 질문들로 넘어가 보기로 하자.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이제까지 다뤄온 것들을 네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고 금방 선명해질 터이니.
묻고 싶은게 정말 많습니다. 묻고 싶은 것들이 워낙 많아서 우선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들. 가장 두드러진 것들에서 시작해야 할 듯 싶습니다. 예컨데 왜 세상이 지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나 하는 문제 같은 거요.
그것은 인간이 신에게 던진 질문들 가운데서 가장 자주 물어왔던 것이다. 인간은 그 질문을 태초부터 던져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너희는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알고 싶어해왔다.
그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의 전형은 대체로 이렇다. 만일 신이 더없이 완벽하고 더없이 애정깊은 존재라면, 왜 전염병과 기근, 전쟁과 질병, 지진과 회오리 바람과 태풍을 비롯한 온갖 자연재해, 개인의 극심한 불행과 전세계의 재난을 창조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주의 깊은 신비와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 속에 들어있다.
나는 너희 주변에 너희가 완벽함이라 부르는 것만을 창조하여 내 선함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나는 너희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할 수 없게 하여 내 사랑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미 설명했다시피 너희는 사랑 아님not loving을 증명할 수 있을때까지는 사랑을 증명할 수 없다. 절대계를 제외하고는 대립물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절대계는 너희에게도 내게도 충분치 못했다. 나는 거기에서 언제나 그대로임 속에 존재했으며, 너희가 나온 곳도 거기이다.
절대계 속에는 앎만 있을 뿐 체험은 없다. 앎은 신성한 상태이지만 가장 위대한 기쁨은 존재 속에 있다. 존재는 오로지 체험한 뒤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순서대로 펼쳐놓으면 앎, 체험, 존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성삼위일체', '삼위일체'인 신이다.
성부(聖父)는 모든 이해의 부모요, 모든 체험의 원천인 앎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자(聖子)는 아버지가 자신에 관해 알고있는 모든 것의 체현 또는 육화(肉化 embodiment)인 체험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신(聖神)은 그 아들이 그 자신에 관해 체험한 모든 것의 탈육화(脫肉化 disembodiment)인 존재다. 그것은 오직 알고 체험한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질 때만 가능한, 소박하면서도 절묘한 있음is-ness이다.
이 소박한 있음은 더없는 기쁨이다. 그것은 알고 체험한 뒤에 오는 신의 상태이며, 신이 태초에 갈망했던 상태이다.
물론 너는 신을 아버지-아들로서 설명하는 게 성(性)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설명해야 하는 단계는 이미 지난 사람이다. 나는 여기서 너희의 가장 최근 경전들에 나오는 비유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보다 훨씬 더 앞서 나온 경전들은 이 비유를 어머니-딸의 관계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정확하지 않다. 너희 사고방식에서는 그 관계를 부모-자식 관계로 보는 게 제일 좋을 것이다. 아니면 생기게 하는 것과 생긴 것 간의 관계로 보거나.
삼위일체의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하면 다음과 같은 관계가 이루어진다.
생기게 하는 것/생긴 것/존재하는 것.
이 '삼중의 실체'는 신의 표식이다. 그것은 신성한 패턴이다. 하나 속의 셋은 숭고한 영역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든, 신과 의식이든, 혹은 그 외의 다른 모든 미묘한 관계들을 다루는 문제에서, 너희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반면에 너희는 삶의 모든 조악한 관계들에서는 이 삼위일체 진리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삶의 미묘한 관계들을 다루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런 관계들 속에서 이 삼위일체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 너희 종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삼위일체 진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표현해왔다. 너희 정신과 의사들 중 일부는 초의식과 의식과 잠재의식이라는 용어들을 쓰고, 너희 심령주의자들중 정신과 육체와 영혼을 이야기하며, 너희 과학자들중 일부는 에너지와 물질과 에테르(氣 또는 精氣를 말함-옮긴이)를 본다. 너희 철학자들중 일부는 어떤 것이 생각과 말과 행동속에서 모두 진실일 때만 너희에게 진실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시간을 말할 때 너희는 오로지 세가지 시간, 곧 과거 현재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너희의 지각 속에는 전(前)과 지금과 후(後)라는 세 순간이 존재한다. 우주 속의 지점들을 다루든 자기 방 안의 지점들을 다루든 간에, 너희는 공간 관계의 면에서 여기와 저기와 이것들 간의 사이 공간을 인식한다.
조악한 관계들에서는 너희는 어떤 "사이in-between"도 인식하지 못한다. 숭고한 영역의 관계들은 변함없이 3개조(組)인 반면 조악한 관계들은 언제나 2개조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왼쪽-오른쪽, 위-아래, 크다-작다, 빠르다-느리다, 덥다-춥다, 그리고 일찍이 창조된 것 중에서 최대의 쌍인 남성-여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쌍들에는 사이라는게 없다. 모든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거나, 이 양 극단 중 어느 하나의, 더하거나 덜한 변형(變形)일 뿐이다.
조악한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어떤 개념도 그 대립물의 개념화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너희의 일상 체험 대부분이 이런 현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미묘한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존재하는 어떤 것도 대립물을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 원을 그리며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나아간다.
시간이 바로 그런 절묘한 영역이다. 거기에서 소위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들은 이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즉 그것들은 대립물이 아니라 같은 전체의 부분들이요, 같은 개념의 진행들이며, 같은 에너지의 원들이고, 변치 않는 같은 진리의 측면들이다. 만일 여기에서 너희가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너희의 결론이 옳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점을 논의 할 때가 아니다. 나중에 시간 전체 개념을 탐구할 때 훨씬 상세하게 이 문제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조악한 물질성의 영역속에 있기 때문에 이와 달리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진과 태풍, 홍수와 회오리, 그리고 그밖의 소위 자연재해라는 것들은 원소들(element)이 한 극에서 다른 한 극으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탄생-죽음의 전체 순환 역시 이런 움직임의 일부이다. 이 움직임은 생명의 리듬이다. 조악한 현실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이 리듬을 따른다. 생명 그 자체가 하나의 리듬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파동이고 진동이며, 존재하는 전체의 심장부에서 울려나오는 고동이다.
병은 건강의 대립물로, 너희의 명령에 따라 너희의 현실에서 드러난다. 어떤 수준에서든 너희가 자신을 아프게 만들지 않았는데 아파질 수는 없으며, 건강해지기로 그저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한 순간에 좋아질 수 있다. 개인의 극심한 불행은 그 개인 스스로 선택한 반응이며, 전세계의 재난들은 세계의식의 결과이다.
너희의 질문에는 이런 사건들을 선택한게 나(神)이고, 내 의지와 바램 때문에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건들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나는 그저 너희가 그렇게 하는 걸 관조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건들을 막을 일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너희 의지를 방해하는 것이고, 너희의 신 체험, 곧 너희와 내가 함께 선택한 체험을 도로 빼앗는 것이 되기에.
그러니 너희가 세상에서 나쁘다고 말하는 어떤 것도 비난하지 마라.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너희가 그것의 어떤 면을 나쁘다고 판단했는지, 그리고 정녕 나쁘다면 그것을 바꾸기 위해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보라.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향해 이렇게 물으면서 생각해보라. "지금 이런 재난을 당하면서 나는 자신의 어떤 부분을 체험하고자 하는가? 나는 존재의 어떤 측면을 불러내고자 하는가? " 왜냐하면 삶의 모든 것은 너희 자신의 창조도구일 뿐이며, 삶의 모든 사건은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자신'이 될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영혼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므로, 이 우주에는 어떤 희생자도 없으며 오로지 창조자들만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되리라. 이 행성을 걸었던 모든 위대한 선각자들Masters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희가 그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 간에, 그들 중 어느누구도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지 않은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그들 중 다수가 진실로 박해받았는데도 말이다.
하나하나의 영혼은 모두 선각자들이다. 자신의 기원과 자신의 유산을 기억하지 못하는 영혼들도 있긴 하지만, 개개의 영혼은 지금이라는 순간마다 자신의 더없이 고귀한 목적에 맞고, 가장 빨리 자신을 기억해내는 데 적합한 상황과 조건을 창조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걷는 업보의 길을 판단하려 들지 마라. 너희는 영혼의 계산서 속에서 무엇이 성공인지 알지 못하니, 남들의 성공을 질투하지도 말고, 남들의 실패를 동정하지도 마라. 어떤 것을 재난이라 부르지도 말며, 기쁜 일이라고 하지도 마라. 그것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판단하거나 목격할 때까지는. 한 죽음이 수천의 생명을 살릴 때 그 죽음이 과연 재난인가? 한 삶이 비탄만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과연 기쁜일인가? 그러나 너희는 이런 판단조차 내리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남에게 충고하지 말며,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충고하게끔 내버려둬라.
이것은 남들이 도움을 청할 때 무시하라거나, 너희 영혼이 어떤 환경이나 조건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걸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하는 동안, 꼬리표 붙이기나 판단 내리기를 피하라는 뜻이다. 각각의 상황은 모두 하나의 축복이며, 체험 하나하나마다에는 진짜 진정한 보물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 자신이 빛인 걸 아는 한 영혼이 있었다. 이것은 새로 생겨난 영혼이어서 체험을 갈망했다. 그것은 "나는 빛이다. 나는 빛이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것의 어떤 앎도, 또 그것의 어떤 말도 그것의 체험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영혼이 생겨난 영역에는 빛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영혼이 다 위대했으며 모든 영혼이 다 장대했고, 내 외경스런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의 그 작은 영혼은 햇빛 속의 촛불같았다. 작은 영혼 자신이 그 일부인, 그 위대한 빛 속에서 그것은 자신을 볼 수도 없었고, 자신을 '참된 자신'으로 체험할 수도 없었다.
이제 그 영혼은 자신을 알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지내게 되었다. 그 바램이 너무나 커서 하루는 내가 이렇게 말했다. "작은 영혼이여, 네 그런 바램을 충족시키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아느냐?"
작은 영혼은 물었다. "오, 신이시여, 뭘 해야 합니까? 뭘요? 저는 뭐든지 다 할 겁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에게서 너를 떼내야 한다. 그러고 난 다음 자신을 어둠이라 불러야 한다."고 대답하자,
작은 영혼이 물었다. "오 거룩한 분이시여, 어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가 아닌 것이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작은 영혼은 그 말뜻을 이해했다.
그리하여 작은 영혼은 전체에서 자신을 떼어냈으며, 거기다 또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는 일까지 해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이 영역에서 자신의 체험속으로 온갖 종류의 어둠을 불러들이는 힘을 행사하여 그것들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 영혼은 더없이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아버지시여,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너희가 가장 암담한 순간에 소리치듯이 그렇게.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너희를 버린 적이 없다. 나는 항상 너희 곁에 서있다. 늘 변함없이 '참된 너희'를 기억시킬 채비를 갖춘채, 너희를 집으로 불러들일 채비를 갖춘 채.
그러므로 어둠 속에 존재하는 빛이 되라. 하지만 어둠을 저주하지 마라.
그리고 너희가 자기아닌 것에 둘러싸인 순간에도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고, 그같은 창조를 이룬 자신을 칭찬하라. 너희가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애쓸 때조차도.
그리고 가장 큰 시련의 순간에 행하는 것이 최대의 성공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라. 너희가 창조하는 체험은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싶은지'에 관한 진술이기에.
내가 너희에게 작은 영혼과 태양에 관한 이런 우화를 들려준 건 세상이 왜 이런 식인지 너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며, 모든 이들이 자신의 더없이 고귀한 본질에 관한 신성한 진리를 기억하는 그 순간, 세상은 한 찰라에 변화될 수 있다는 걸 너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지금, 인생은 학교이며 너희가 인생에서 관찰하고 체험하는 것들이 다 너희의 배움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에도 이런 견해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지만, 여기서 다시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너희는 배워야 할 어떤 것도 갖지 않은 채 지금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너희는 이미 알고 있는 걸 밝히기만 하면 된다. 그것을 밝힘으로써 너희는 그것이
제 기능을 다하게 만들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삶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그것에 목적을 부여한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삶을 거룩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나쁜 일들이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이란 말씀인가요? 이 세상의 재앙과 재난들조차 어떤 면에서 보면 '참된 자신'의 대립물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창조해낸 것이란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창조하는 좀 덜 고통스런 방식,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덜 고통스러운 방식은 없나요?
너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그 하나하나가 다 좋은 질문들이다. 자, 그것들을 한번에 하나씩 다뤄보기로 하자.
아니다. 너희에게 일어나는, 소위 나쁜 일들을 다 너희가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자각된 감각으로는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너희 자신의 창조물들이다.
너희는 항상 창조하는 과정 속에 있다. 순간순간마다, 일분일분마다. 그리고 날마다. 너희가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는지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지금은 그것에 대한 내 이야기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라. 너희는 하나의 커다란 창조기여서 말 그대로 너희가 생각하는 속도만큼이나 재빠르게 새로운 현상들을 드러내간다.
일과 사건과 조건과 상황들은 모두 의식에서 창조된다. 한 개인의 의식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강력하다. 그렇다면 너희는 둘 이상의 의식이 내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어떤 종류의 창조에너지가 분출될지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대중의식이라면? 그 힘은 너무나 막강하여 세계적인 중요성과 지구적인 결과를 갖는 사건들과 환경들을 창조할 수 있다.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방식으로, 너희가 그런 결과들을 선택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는 만큼이나 너희도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너희 역시 나처럼 그것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에 비추어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떤 희생자도 없고 어떤 악당도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선택으로 네가 희생되는 일도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너희가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들 전부를 너희 자신이 창조해냈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들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앞선 수준의 사고방식으로 모든 선각자들이 늦던 빠르던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일부라도 바꿀 힘을 얻는 것은 그들이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그따위 짓을 하는" 어떤 것이나 어떤 자가 저 밖에 있다는 관념을 즐기고 있는 한, 너희는 그것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말할 때라야 비로소 너희는 그것을 바꿀 힘을 얻을 수 있다.
네가 하는 걸 바꾸는 게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바꾸기보다 훨씬 쉽다.
뭔가를 바꾸는 첫단계는 네가 그렇게 되도록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설사 너희가 개인 차원에서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너희의 오성으로 이 말을 받아들이도록 하라. 그러고 나서는 어떤 것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진술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바꾸고자 노력하라.
어떤 행동을 하는 데는 딱 한가지 이유가 있을 뿐이다. 즉 우주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술하는 것으로서만.
삶을 이런식으로 이용할 때 삶은 '자기' 창조가 된다. 너희는 자신을 '자신'으로, 그리고 '항상 되고자 했던 자신'Who You've Always Wanted to Be으로 창조하기 위해 삶을 이용한다. 어떤 일을 하지 않는 이유 역시 딱 한가지뿐이다. 즉 그것이 더 이상 '되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진술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 그것은 더 이상 너희를 반영하지 않고, 더 이상 너희를 대변하지represent 않는다.(즉 그것은 너희를 재표출 re-present시켜 주지 않는다......)
만일 너희가 정확하게 재표출되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영원속에 투영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과 맞지 않는, 삶의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은 너희가 선택한 것들이다. 잘못은 그것들을 선택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데 있다. 그것들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은 너희 자신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창조한 것이 너희 자신이기 때문에.
너희는 이런 꼬리표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나쁘다는 꼬리표를 달기 보다는 그것들이 너희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너희가 세상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게 바로 이 지적(知的), 영적(靈的) 부정직함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세상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받아들였다면, 혹은 책임감을 깊이 느끼기만이라도 했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다같이 책임감을 느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라는 바로 그 점이, 그것을 그토록 완벽한 고통으로 만들고, 그토록 신랄한 역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자연재해와 재난들, 즉 회오리와 태풍, 화산폭발, 홍수 따위의 물질적 소동들을 특별히 네가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창조하는 것은 이런 사건들이 네 삶에 미치는 강도다.
우주에서는 그 어떤 분방한 상상력으로도 네가 조장하고 창조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런 사건들을 창조해내는 것은 인류의 결합된 의식이다. 세상 전부의 공동창조가 이런 체험들을 낳는다. 너희 각자가 하는 일은, 그것들이 뭔가 의미가 있다면 자신에게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것들과 관련해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판단하면서 그것들을 경험하며 지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영적 진화라는 목적을 위해 집단으로, 또 개인으로 너희가 체험하는 삶과 시간들을 창조하고 있다.
너는 이런 과정을 좀 덜 고통스럽게 겪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외부체험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겪는 세상 체험과 세상 사건들에서 연상하는 고통을 줄이려면, 너는 그것들을 보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네가 외부 사건을 바꿀 수는 없다. (외부 사건은 너희 다수가 창조해낸 것이다. 집단이 창조한 것을 개인이 바꿀 수 있을 만큼 네 의식이 충분히 성숙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면 체험을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삶을 깨닫는mastery 길이다.
저절로, 그리고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건 아무것도 없다. 고통은 잘못된 생각의 결과다. 그것은 생각의 오류이다.
선각자들은 가장 쓰라린 고통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선각자들은 이런 식으로 치료한다.
고통은 너희가 어떤 것에 관해 내린 판단 때문에 생긴다. 그 판단을 제거해보라. 그러면 고통이 사라진다.
판단은 흔히 과거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것에 대한 너희의 관념은 그것에 관한 이전 관념에서 나온다. 이전 관념은 그보다 더 앞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고, 또 그 관념은 다시 그보다 더 앞의 관념에서 나오고...... 마치 벽돌을 쌓듯이. 이 거울의 방 속에서 내가 '맨처음 생각' first thought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거슬러올라 갈 때까지.
모든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으나 어떤 생각도 원래생각original thought보다 더 강하지는 못하다. 이따금 이 원래 생각을 원죄original sin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죄는 어떤 것에 관한 너희의 맨처음 생각이 틀렸을 때이다. 그러고
나서 그 틀림은 너희가 그것을 두 번 세 번 생각해감에 따라 몇번이고 합성된다.
성신이 하는 일은 너희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날 새로운 오성에 이를 수 있도록
너희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다.
당신은 내가 굶어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이들과, 미국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불의, 브라질에서 수백명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지진에 대해 유감스럽게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의 세계에는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너를 반영하는 것, 너 자신의 위대한 변형으로서 너를 재표출해주는 일을 하라. 유감스럽게 느끼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심판하지도 비반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너희는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도, 어떤 식으로 끝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점을 명심하라. 너희가 비난하는 것이 언제고 너희를 비난할 것이며, 너희가 심판하는 것이 언제고 너희를 심판하리란 것을.
차라리 네 가장 고귀한 '자신'을 더 이상 반영하지 않는 것들을 바꾸려 노력하거나, 그런 것들을 바꾸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하라.
그럼에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라. 그 모든 것이 다 신의 창조이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창조이기에.
여기서 잠시 멈추고 제가 좀 따라잡게 해주시겠습니까? 좀 전에 신의 세계에는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없다고 말씀하신 게 맞나요?
맞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당신의 세계에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럼 어디에 존재하는 겁니까?
호오, 어디에.....?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어디에 나타난다는 거죠? 당신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요
너희의 상상 속에.
하지만 옳다 그르다, 하라 하지 마라,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들에 대해 제게 가르쳐준 사람들은 그 모든 규칙들을 당신, 곧 신이 설정해놓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를 가르친 사람들이 틀렸다. 나는 한번도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라"거나 "하지 마라"는 걸 설정한 적이 없다. 그렇게 한다면 너희가 받은 최고의 선물, 즉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하고 그 결과를 체험해 볼 기회와, 너희가 '참된 자신'의 모습과 닮은꼴에 비추어 자신을 새롭게 창조할 기회와, 또 자신의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더욱 더 고귀한 자신을 만들어줄 공간이란 선물을 빼앗는 것이 되리라.
어떤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그르다"는 것은 너희가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너희 자신을 금하는 것이다. 너희를 금하는 건 자신을 제한하는 것이며, 자신을 제한하는 건 '참된 자신'이라는 실체를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실체를 창조하고 체험할 기회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내가 너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내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지옥으로 보내리라
주장한다. 무슨 그런 자유의지가 있단 말인가? 이런 주장은 우리 사이의 진짜 관계가
아닐 뿐 아니라, 신을 조롱하는 짓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