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권의 역사
태극권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창시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논문들이 발표되었지만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점은 비단 태극권 뿐 만 아니라 타 무술의 문파, 한국의 전통무술의 문파에서도 흔히 보이는 내용이다.
그러나 태극권의 역사상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근대 태극권의 원류가 중국 하남성 온현의 진가구이며, 태극권이 바로 이 곳에서 전승 발전되어 왔다는 점이다.
태극권의 창시에 관해서 여러 설이 나타나 있지만 다음 네 가지의 설이 태극권 창시에 대해 가장 지배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첫째, 무당산 도가 선인인 장삼봉 창시설.
둘째, 진가구 시조 진복 창시설.
셋째, 태극권경의 저자인 왕종악 창시설.
넷째, 명말청초 무장이었던 진왕정 창시설이다.
이러한 설에 대해서는 중국 내에서도 많은 설전이 오고갔지만 가장 정확한 고증은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국 하남성 온현 진가구에서 태극권의 기원을 연구 조사하였던 중국 중앙 국술관의 편집처장을 지낸 당호선생의 연구결과이다.
당호 선생의 "태극권은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초기에 무장 진왕정(1600~1680)에 창시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발원지
태극권의 발원지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온현(溫縣)의 진가구(陳家溝)이다. 진가구는 온현성(溫縣城) 동쪽의 청풍령(靑風㱓)에 위치하고 있으며, 600년 전에는 상양촌(常陽村)이라고 불렀다.
온현의 현지(縣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명(明)나라 홍무(洪武) 초년, 원(元)의 철목이(鐵木耳)가 회경(懷庚)을 맡고 있었는데, 명나라의 군사가 오랫동안 그곳을 공격하였으나 항복을 받지 못하자 천하통일의 꿈을 달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몹시 조급하게 되었다. 이에 명 태조(太祖)가 그곳 백성들에게 분풀이를 하여 대량 학살을 감행하였으니 그때 온현 사람들이 매우 많이 죽었다. …”
그래서, 회경의 사람들에게는 “세 번씩이나 혹독하게 유린당하여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여태껏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 곳에 사람의 흔적이 거의 끊어지게 되자, 정부에서 다른 지방의 사람들을 이주시켜 밭을 갈고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하였다.
당시 이주민 열 중의 여덟 아홉 명은 산서성(山西省)의 홍동(洪洞)에서 옮겨왔는데, 그 곳에는 지금까지도 “우리 조상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산서 홍동의 대괴수(大槐樹)에서 왔답니다”라는 말이 남아 있다.
이러한 때에 진가구에 정착한 진씨(陳氏)의 시조는 진복(陳卜)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원적(原籍)이 산서(山西) 택주군(澤州郡)이지만, 후에 택주에서 산서의 홍동현(洪洞縣)으로 옮겨와 살았다. 그후 명나라 홍무 7년(1374), 하남(河南)의 회경부(懷庚府)로 이주해 왔다.
-진씨태극권 계보
시조 진복
시조 진복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후덕할 뿐만 아니라, 권술과 병장기 등의 무술에도 정통하였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그가 살았던 곳을 진복장(陳卜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진복장은 그 지세가 낮아 자주 수해를 입게 되자, 다시 온현성에서 동쪽으로 십리 거리에 있는 상양촌(常陽村)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마을에는 남북으로 뻗어 있는 깊은 도랑〔溝 : 구〕이 있었는데, 진씨의 인구가 번성함에 따라 진씨 가문과 지리적 특성을 살려 상양촌은 진가구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시조 진복(陳卜)은 온현에 정착한 이후, 가업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농지를 개간하여 경작에 힘쓸 뿐만 아니라, 마을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다지는 데 진력하였다. 처음에는 6대가 함께 살다가, 7대에 이르러 분가(分家)를 하고 가업을 일으켜 세우니 그 인구가 점점 번성하게 되었다. 고향을 지키고 안정을 얻게 되자 마을에 무학사(武學社)를 세워 자손들을 가르쳤다.
진씨(陳氏)의 선조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1711년 진씨의 10대조 진경(陳庚)이 진복(陳卜)의 비석을 세웠는데 거기에 비로소 진복에 대한 기록이 간단히 적혀 있다.
무예·인물·사적 등 진씨 가문에 대한 문자 기록으로서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진씨 9대조 진왕정(陳王廷)의 대에 이르러 기록된 것이 처음이다.
온현의 현지(縣誌)와 진씨 가보(家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왕정(陳王廷)은 명말(明末)때 사람으로 권술에 정통하였다. 그는 권술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마음으로 깨닫는 바가 많았으니, 이것이 대대로 전해져서 독특한 진씨 가문의 비법을 이루었다.”
제9대조 진왕정(陳王廷 1600-1680)
진씨 제9대조 진왕정(陳王廷 1600-1680)은 또한 주정(奏庭)이라고도 부르는데, 명말(明末) 청초(淸初)때 사람이다. 문무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권술과 병장기에 두루 정통하였는데 그 조예가 깊어, 하남(河南)·산동(山東) 일대에서 매우 명성이 높았다. 그는 일찍이 산동에서 도적 떼를 소탕했는데, 그후 도적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서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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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뜻을 펴지 못하고 은거하며 살았다.
그는 노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무술을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권술을 근간으로 하여 여러 문파의 정수를 모아 그 장점을 취하여 접목하는 한편, 태극음양(太極陰陽)의 이치를 결합시키고, 중의(中醫)의 경락(經絡)학설과 도인(導引)·토납(吐納)의 기술을 참고로 하여 음양상합(陰陽相合)하고 강유상제(剛柔相濟)하는 이치로 구성된 권법을 새로이 창조하였으니, 이것이 오늘 날 태극권의 시초인 것이다.
당시 진왕정이 창안하여 후대에 전수한 것은 일로(一路)에서부터 오로(五路)에 이르는 태극권 오로(太極拳五路)를 비롯하여 포추 일로(炮捶一路)·장권 108세(長拳百八勢)·쌍인추수(雙人推手)와 도(刀)·창(槍)·검(劍)·곤(棍)·간(金間 ) ·쌍인점창(雙人粘槍)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쌍인추수(雙人推手)와 쌍인점창(雙人粘槍)은 예전에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풍격을 지니고 있다.
진왕정은 이에 대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애석하게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대부분 산실(散失)되었고, 지금은 ≪권경총가(拳經總歌)≫와 ≪장단구(長短句)≫ 한 수가 남아 있다.
장단구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니 감회가 새롭구나.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서
도적들을 소탕하느라 얼마나 많은 위험을 만났던가! 그 공로로 나라의 은혜를 입기도 하였으나 세월을 헛되이 보내며 이렇게 오늘에 이르고 보니,
이제는 늙어서 남은 목숨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로지 남겨진 ≪황정(黃庭)≫ 한 권을 곁에 두고서, 마음이 답답할 때는 권법을 만들고, 조급함이
일 때는 밭을 갈고는 한다네. 틈틈이 시간을 내어 여러 아이들을 가르치니 제나름대로 용이 되고 호랑이가 되어 간다네. 관가에 양식을 빚지면 일찍
갚아주고, 이웃이 빚을 요구하면 즉시 돌려주고, 교만하거나 아첨하지 않으며 참고 양보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네. 사람들이 나더러 어리석다
말하고, 사람들이 나더러 미쳤다고 말하지만, 늘 귀를 씻고 벼슬살이를 마다하였네. 수많은 제후(諸侯)들을 비웃으며 내 나름대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나의 마음속에 늘 여유 있고 편안함을 추구하고, 명예나 이익을 절대로 탐하지 않는 것이 보다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네.
이제 세상살이의 이치를 깨닫고 보니 저 한단(邯鄲)을 알게 되고, 물고기가 노니는 물가에서 성정(性情)을 도야하며 산천에 머물고 있으니, 흥한들
어떠하며 망한들 어떠하겠는가. 세상을 사는 경계가 평안하고 건강하며 언제나 물욕이 없다면, 시기할 것도 구할 것도 없는데 어찌 세상살이를
참견하겠으며, 성공한들 어떠하며 실패한들 어떠하랴. 그러하니 이 몸이 신선이 아니라면 누가 신선이겠는가?”
진왕정(陳王廷) 이후로 진가구에서는 태극권을 수련하는 풍조가 성행하게 되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태극권을 연습했는데 그 지방에 전해지는 속담에, “진구(陳溝)의 물을 마시면 모두 다리를 번쩍번쩍 높이 뻗을 수 있게 된다네.” “금강대도대(金剛大搗碓)를 할 줄 아느냐?” 라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풍조는 대대로 이어져 오랜 세월이 흘러도 쇠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자연히 역대의 명수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제14대조 진장흥(陳長興), 진유본(陳有本)
진씨 14대조 진장흥(陳長興, 1771-1853)은 자(字)가 운정(雲亭)으로, ≪태극권
십대요론(太極拳十大要論)≫·≪태극권 용무요언(太極拳用武要言)≫·≪태극권 전투편(太極拳戰鬪篇)≫ 등의 저서를 남긴 근대 태극권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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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상 대대로 전해져오던 ‘노가 투로(老架套路)’를 기초로 하여 그 이전에 복잡하게 많았던 태극권의 투로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모든 권가(拳架)를 재창조하였으니, 바로 오늘날의 진씨태극권 일로(一路)와 이로(二路: 또는 포추<炮捶>라고도 함)가 그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태극권 노가식(太極拳老架式) 또는 대가식(大架式)’이라고 부른다.
장흥공(長興公)은 오늘날의 경호원에 해당하는 보표(保鏢)라는 직업으로 생업을 꾸리며 산동(山東) 지방에서 근무하였는데 그 지역 무술계에서 매우 이름을 날렸다.
어느 날, 그는 무대 앞에서 연극을 보느라 수백 명의 인파 속에 서 있었는데,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 들어오며 밀어 부쳐도 그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가까이 간 사람은 마치 흐르는 물이 돌에 부딪친 것처럼 저항하지 못하고 저절로 떠밀렸으니, 사람들은 그를 “패위대왕(牌位大王)”이라고 불렀다.
산동에서 보표로 일하면서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도적 떼들이 그의 앞에서는 아예 종적을 감추게 되니, 노(魯) 지역 사람들은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 기념으로 삼았다.
그의 아들 경운(耕耘)도 무예에 정통하여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경운(耕耘)의 아들 연년(延年)과 연희(延熙)도 모두 태극권의 명수가 되었다. 특히 장흥공(長興公)은 그 유명한 제자 양로선(楊露禪)을 가르쳤다.
진장흥(陳長興)과 같은 시기의 14대 진유본(陳有本)도 태극권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원래 있던 투로(套路)의 기초 위에서 어려운 동작과 발경(發勁)하는 동작들을 삭제하거나 변형시켜 난이도를 크게 낮춘 투로를 새로 개발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그 가식(架式)이 노가 일로(老架一路)와 같이 크고 넓게 전개하는 것으로 후세 사람들은 이를 신가(新架)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후 진발과(陳發科)에 의해서 새로운 신가(新架) 투로가 나옴에 따라 오늘날에는 이것을 소가(小架)라고 부르고 있다.
제15대 진청평(陳淸萍)
제15대 진청평(陳淸萍)은 진가구에서 동북쪽으로 오리쯤 떨어진 조보진(趙堡鎭)으로 가서 데릴사위로 살았는데, 그곳에서 권술을 전파하면서 새로운 투로를 창안하였다.
그는 원래의 투로에 다시 수정을 가하여 작고 정교하면서도 치밀하게 하였으며, 점차 그 범위를 더하여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변화시키고, 나아가 권술의 기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연습 투로를 만들어 후대에 전수하니, 16대 화조원(和兆元) 문파에서는 이것을 조보가식(趙堡架式)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16대 이경연(李景延) 문파에서는 홀뢰가식(忽雷架式)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제16대 진흠(陳鑫)
제16대 진흠(陳鑫, 1849-1929)은 자(字)가 품삼(品三)이다.
그는 진씨의 권술이 역대로 모두 구전(口傳)으로만 전수되어 문자 기록이나 저작(著作)이 매우 드물다는 것을 깨닫고,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태극권의 학설을 밝히고 그 내용을 보존하기 위해 책을 쓸 것을 결심하고, 12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진씨태극권도화강의(陳氏太極拳圖畵講義)≫ 4권을 저술하기에 이르니, 마침내 진씨 가문에 대대로 축적되어 온 연권(練拳)의 경험이 세상에 명백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그는 역리(易理)로써 권리(拳理)를 설명하며 경락학설(經絡學說)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며, 전사경(纏絲勁)을 핵심으로 하여 내경(內勁)을 총괄하였는 바, 이것은 진씨태극권 이론의 보고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편이 된 것이다.
이외에도 ≪진씨가승(陳氏家乘)≫·≪삼삼육권보(三三六拳譜)≫ 등의 저서가 있다.
제17대 진발과(陳發科)
제17대 진발과(陳發科, 1887-1957)는 자(字)가 복생(福生)이다. 이 사람은 근대 진씨태극권의 대표적 인물로 태극권의 발전과 전파에 뛰어난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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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부터 1957년까지 줄곧 북경(北京)에 머무르면서 권술을 가르쳤다.
그는 강유상제(剛柔相濟)의 권법을 펼침에 있어 채(採)·열(扌列 )·주(肘)·고(靠)·나(拿)·질(跌)·척(擲)·타(打) 등의 동작들을 겸용하였는데, 그 기격(技擊) 기술이 매우 뛰어나 사람들과 겨룰 때면 반드시 이길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형태가 드러나지 않는 교묘하고 우수한 격법(擊法)으로 상대를 압도하였으며, 더욱이 그의 충직하고 온후한 인간성과 고상한 무덕(武德)으로 인하여 항상 각계 인사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문하에 매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니, 심가정(沈家偵)·고류형(顧留馨)·홍균생(洪均生)·전수신(田秀臣)·뢰모니(雷慕尼)·풍지강(馮志强)·이경오(李經梧)·초마림(肖麻林) 등이 있다. 그의 아들 조욱(照旭)·조규(照奎)와 딸 예하(豫霞) 역시 그 권술이 매우 뛰어났다.
제18대 진조규(陳照奎), 진조비(陳照丕)
제18대 진조규(陳照奎, 1928-1981)는 일찍이 북경(北京)·상해(上海)·정주(鄭州)·초작(焦作) 등지에서 권술을 가르쳤는데 그에게서 배운 사람들이 매우 많아 진씨태극권 보급에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 그가 주로 전수한 권가(拳架)는 그의 부친인 진발과(陳發科)가 만년에 제정한 팔십삼세식(八十三勢式)으로 오늘날 신가(新架)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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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진조비(陳照丕, 1893-1972)는 자(字)가 적보(績甫)이다.
1928년 가을, 북경 동인당(同仁堂) 동가(東家)의 낙우신(樂佑申)과 낙독동(樂篤同) 형제는 진씨태극권의 명성을 흠모하여 하남(河南) 심양(沁陽)의 두성흥(杜盛興)에게 진가구에서 사범을 초빙할 것을 부탁하자, 그 집안 사람들이 진조비를 추천하여 가게 되었다.
그가 북경(北京) 당시는 北平이라고 하였음.에 도착하자, 고향 사람 이경장(李敬庄)이 북평만보(北平晩報)(1928년 10월)에 “우리 나라가 무술을 제창하는 목적은 나라를 지키고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무술을 익혀서 잃어버렸던 땅을 다시 찾읍시다.”라고 기재하여 널리 알렸다고 한다.
진조비(陳照丕)는 권술 이론에 매우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수십 년간 권술을 수련하여 왔는데 그는 평생을 통하여 쌓아온 경험과 이론을 ≪진씨태극권회종(陳氏太極拳滙宗)≫·≪태극권입문(太極拳入門)≫·≪진씨태극권도해(陳氏太極拳圖解)≫·≪진씨태극권이론13편(陳氏太極拳理論十三篇)≫ 등의 저서를 통하여 후세에 소상히 전하였다.
또한 그는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는데 오늘날 사대금강(四大金剛)이라 불리는 진소왕(陳小旺), 진정뢰(陳正雷), 왕서안(王西安), 주천재(朱天才)를 비롯하여 현대 태극권을 전파하는 특출한 인물들이 그 밑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그는 인품이 고상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진씨태극권을 널리 전파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고 국내외의 각계 인사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진씨태극권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뛰어난 업적을
거두었으며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당대(當代)의 종사(宗師)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