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이석태 옮김), 1997, 보리
'당신을 위해 장작 한단 가져올 힘이 없구려. 이제 그만 삶의 끈을 놓으려 하오.' 사랑하는 남편이 이런 말을 꺼낸다면 아내는 뭐라 답해야 할까. 글쓴이에 의해 '가장 바람직한 사람'이라 칭해진 행동하는 지성, '스코트 니어링'의 아내인 '헬렌 니어링'은 놀라 호들갑 떨지 않았다. "훌륭한 삶을 산 여보, 썰물처럼 가세요. 당신은 자신의 몫을 다 했구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세요."라고 격려해 주었다.
사람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아무런 병이 없다고 진단한지 보름 안에 잠자듯 돌아가신 할머니는 당시 97세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전에 죽는다. 병으로 죽고 사고로 죽는다. 그런데,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억울할 것이다. 왜 나에게(또는 그에게) 이런(또는 그런) 일이… 이른 나이에 질병에 걸려 죽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생물에 비교할 때 사람의 수명은 경이롭게 길다. 사람의 수명이 긴 이유는 인위적인 생태계 재단으로 들 수 있다. 특정 식물의 재배, 특정 동물의 가축화, 특정 미생물을 이용하는 발효만이 아니다. 해충이라며 박멸한 생물종, 무리한 개발로 멸종당했거나 멸종 중인 생물종은 얼마나 많은가. 생물종의 수명을 이렇듯 강탈하여 인간의 수명이 길어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람의 수명이 객관적으로 길다지만 철들어 느끼는 인생은 짧기만 하다. 대학 졸업 후 겨우 들어간 직장 생활, 조금 지나 결혼하면 젊은 시절의 찬란했던 꿈은 모두 사라지고 하루하루 지친 일상에 젖는다. 아이 낳자 모든 관심사는 아이에게 돌아가고, 아이가 결혼하면 손자에게 이동한다. 손자가 크자 몸이 늙어버렸다. 긴 수명에 짧은 인생. 이게 사람의 생활사인지 모르겠다.
스코트 니어링, 언제나 건강했던 그는 죽는 날까지 소신대로 살았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대학교수가 된 그는 사회의 실상을 목격하고부터 부정의에 항거하는 이른바 '행동하는 지성인'이 되었다. 부자에게만 기회가 보장되는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의 불이익, 가난한 이가 당하는 불평등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보수적인 대학에서 즉결처분 받듯 쫓겨나야 했다. 간신히 작은 대학에 복직되었으나 전쟁이란 '문명 국가들이 조직적으로 저지르는 파괴와 대량 학살이자,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벌이는 힘 겨루기'라는 주장으로 1차대전 참전을 반대하여 강제 퇴직을 감수해야 했고, 심지어 전쟁의 원인은 이상주의가 아닌 상업주의가 저지른 것이라는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는 주장을 한 죄로 연방법원에 기소되기까지 했다.
그때 그는 '자유로운 영혼' 훗날 헬렌 니어링이 될 헬렌 노드를 만날 수 있었다. 삶의 맨 밑바닥이었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그를 도와 자료를 챙겨주고 연구를 도와주면서 헬렌은 21살이나 연상인 스코트를 존경하게 되고, 두 사람은 함께 시골로 내려가 농사지으며 자신들의 사상을 자유롭게 펼치게 되었다. 이성적인 남자와 감성적인 여성, 정반대 성격의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과 존경으로 조화로운 일생을 보람 속에 살았다. 아버지 나이의 딸깍발이 전직 교수와 고등학교만 졸업한 평범한 젊은 여인의 만남은 이후 스코트 니어링이 100세 생일이 3주일 흐른 날까지 이어진다.
이쪽에 보이던 배가 수평선 넘어 사라지지만 건너편에서 '저기 배가 나타났다'고 탄성을 지르는 것, 죽음이란 단지 수평선과 같은 것. 채식주의자에 농부로 사상가로 강연자로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던 스코트 니어링이 헬렌 니어링을 위해 나무 한단 가져오는데 힘이 부치자, 수평선 이쪽의 삶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처음 딱딱한 것을 삼가고, 나중에 물만 마시다가 아주 건강한 상태에서 만족스런 표정으로 부인의 따뜻한 격려 속에 조화로운 삶을 마감하고… 90을 바라보는 헬렌 니어링은 10여 년 전 그와 같이 지은 돌집에서 그의 체취를 느끼며 그를 만났던 일, 그와 살던 50여 년의 추억을 여성의 눈과 마음으로 엮어나간다. '자유로운 영혼 헬렌 니어링, 그 감동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바로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그 책이다.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이석태씨가 번역을 맡았고.
마지막 해를 보내던 중, 간디와 톨스토이말고 동시대인 중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스코트 니어링은 "헬렌!"이라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헬렌 니어링은 소녀와 같이 행복한 탄성으로 뛰어와 끌어안고 키스했다는 인터뷰 기사는 우리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한다.
최근 사람의 건강수명이 줄어든다고 한다. 개발과 오염으로 열악해진 환경에서 약에 의존한 수명이 길어졌을 뿐이라 한다. 건강수명만이 줄어든 것은 아닐 것이다. 짧디짧은 인생에서 소신 있는 건강한 삶 역시 줄어들었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약 한 알 먹지 않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은 수평선 너머로 자연처럼 갔다. 다시금 조화로운 삶 속으로. 그 두 사람처럼,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잘 살다 아름답게 갈 수 없는 것일까.
상업주의가 빚어낸 발렌타인이나 화이트데이가 지난, 4월 14일은 애인 없는 외톨이에게 짜장면 사주는 이른바 블랙데이란다. 초콜릿이나 사탕보다 하다 못해 짜장면보다, 연인과 친구에게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한 권 선물하면 어떨까. 말초적 달콤함보다 진한 감동이 벅차게 밀려와 다시 만날 때 서로의 따뜻한 애정과 우정을 각인하게 될 텐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건강보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다 아름답게 죽을 수 있는 조화로운 인생을 계획할 수 있을 텐데… 시민참여의 가치를 새삼 깨달은 총선 이후, 앞날이 구만리 같은 이 시대의 젊은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인천환경운동연합 소식지, 갯벌과물떼새, 200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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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 헬렌 니어링
by 치우 posted Sep 15, 2003

